mea culpa, mea culpa

by Rudolf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

|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모두 내 탓이로소이다


1


의준은 견딜 수가 없었다. 송이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머릿속으로는 온갖 공상 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고 나면 공상 전보다 마음이 더 힘들어졌다. 그런데도 송이에게서 전화가 오면 받지 않았다. 그리고는 티소의 ‘무도회’ 그림 뒷면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텅 빈 그곳.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공백.

드넓은 펜트하우스. 그 한쪽에 소파를 비롯한 보잘것없는 가구들, 그리고 또 그 옆에 쌓아놓은 잡동사니. 펜트하우스 그 드넓은 공간에는 하다못해 책들을 꽂아놓을 책장도 없다. 그런데 또 다른 공간에 이젤만 하나 동그마니 놓여 있는 것이다.

그동안 의준은 실내를 그럴듯하게 장식해 볼까 하고 몇 번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늘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은 언제 생명이 끊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의해서. 그 누군가는 의준 자신이 선택한 어떤 사람, 의준이 자신을 저격해 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을 끊임없이 찾아다녔다. 아무에게나 자신을 죽여달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의준을 죽일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 사람, 또 그 대가로 저격 성공보수뿐만 아니라 의준의 재산을 모두 차지할 수 있는 자격도 갖춘 사람. 이를 위해 사람을 찾고 찾다가 결국 의준은 계 실장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런 뒤로 의준은 더더욱 펜트하우스에 대해서는 무신경하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송이의 존재가 나타나고, 또 그녀가 펜트하우스에 다녀간 뒤로 의준은 자주 실내를 돌아보게 되었다. 특히 떠버리가 송이와 함께 펜트하우스에 온 날 떠버리가 송이에게 펜트하우스를 잘 꾸며보라고 말한 뒤부터는 그 생각이 자주 의준의 머리에 떠올랐다. 떠버리가 괜히 자기과시를 하려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한 말이었을 텐데도.

떠버리 말처럼 펜트하우스 리모델링을 송이에게 부탁해 볼까…….

그렇지만 머릿속에서만 그 생각과 함께 여러 가지가 뒤엉켜 맴돌 뿐, 실제로는 송이에게서 온 전화도 받지 않는 것이었다.

어쩌면 의준은 자신이 실제로는 무척 사치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의준은 예술에 대한 책을 많이 사모았다. 그중에는 ‘Art of Celebration(축제의 예술)’이라는 것이 있다. 그 책은 주로 파티의 장식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의준은 그 책에 실려 있는 화려한 장면들을 늘 마음속으로 동경하고 있었다. 실내외는 물론 넓은 정원에 멋들어진 텐트를 치고 그 아래를 꿈결 장면들처럼 장식에 놓은 사진들을 보고서, 그 모습처럼 펜트하우스를 고쳐놓으면 어떨까 공상해 보곤 했다. 펜트하우스는 원래 레스토랑을 만들려 한 장소였다. 천장도 엄청 높고 사방이 유리창으로 둘려 있어서 전망이 기막히게 좋다. 만일 펜트하우스를 의준이 가지고 있는 여러 책들, 예술과 건축과 실내장식 등에 대한 서적들을 펼쳐보면서 꿈을 꾸었던 그 장엄하고도 화려한 모습으로 바꾼다면, 그리고 송이를 그 장면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준다면……. 비록 모조품일지라고 명화와 조각상들로 채우고서 그 사이를 송이와 함께 물결 따라 흐르듯 돌면서 감상하고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인생을.

의준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던 토마 쿠튀르(Thomas Couture, 1815~79)의 772×472cm짜리 초대형 그림 ‘데카당스 속의 로마인들(The Romans in the Decadence of the Empire)’이 문득 떠올랐다. 쿠튀르가 1847년에 완성한 그 작품의 장면은 ‘decadence(타락)’라는 말에 어울릴 정도로 화려하고 사치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바로 그러한 장면을 의준은 송이에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여기에서 의준의 마음에 가장 끌리는 말은 ‘데카당스’라는 단어다. 타락. 그리고 그 그림에서 보여주는 사치. 의준은 마음속으로 늘 이것을 동경하고 있었다. 로마의 거대한 남신(男神)들 조각상들과 고전주의 코린트식 오더(order) 장식의 높다란 원형 대리석 기둥에 둘러싸인 채 먹고 마시는 반나의 선남선녀들. 그들은 자신들이 제국의 몰락을 이끄는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오직 화려함과 타락에만 취해 있다. (‘오더’는 기둥과 그 위쪽의 화려한 엔타블레이처(entablature) 장식을 말한다.)

이와 같이 의준은 살벌한 느낌마저 주는 휑한 펜트하우스를 로마제국의 타락과 화려함으로 장식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장면 속에 등장해야 할 인물은 ‘데카당스’의 수많은 퇴폐 선남선녀들이 아니라 오직 의준과 송이 둘뿐이다.

의준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의준은 울고 있었다.

의준은 자신이 새로운 의준이 되었을 때 온 세상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의준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의준이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하나 죽음. 그것을 늘 동경처럼 그리고 있었다. 이제 새롭게 또 하나의 동경이 피어나기 시작했으나, 동시에 그것은 죽음을 그리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의준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송이였다.



2


의준은 강남으로 갔다. 그리고 송이와 함께 앉았었던 그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자리는 좀 한산했다. 그러나 의준은 일부러 지난번 자리 잡았던 창가 테이블에서 가장 먼 곳에 가서 앉았다. 창가나 구석이나 모두 환한 조명 아래였으나 의준은 자신이 앉은 곳은 어두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자가 져서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지난번 앉았던 밝은 창가의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창가의 그 테이블은 남들이 보기에도 낭만에 차 있었으리라. 재잘거리는 밝은 얼굴의 처녀와 그 모습을 꿈꾸는 눈으로 바라보는 총각. 그날의 대화가 슬며시 의준의 기억 속에서 기어나와 다시 의준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있잖아요, 겨울바람이 봄바람한테 춥다고 타박한대요. 꽃샘추위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고. 그렇지만 봄바람은 겨울바람에게 부럽다고 한대요. 왜 그런 줄 아세요? 겨울에는 애인들끼리 꼭 껴안고 다니잖아요……. 재미없나 봐요? 웃지도 않으시네…….”

아닙니다. 재미있습니다……. 하마터면 지금 의준은 이렇게 말을 할 뻔했다. 아무도 없는 구석 자리에서. 혼자서 슬그머니 미소까지 지으며. 그러나 그날에는 송이 말대로 아무런 대꾸도 표정도 없이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물고 앞만 똑바로 바라보기만 했었다. 예비군 훈련 때 재미없는 조교 얼굴 쳐다보듯이.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또 얘기해 주세요. 더 많이, 더더 많이…….

지금 의준은 후회하고 있었다. 그날 미소라도 지어줄걸. 얘기를 더 해달라고 조를걸. 아니, 조른다는 말은 좀 그렇고, 눈이라도 초롱초롱 빛내면서 송이가 이야기하는 입술을 바라볼걸…….

이렇게 망연한 생각에 잠겨 있으면서도 의준은 안도하는 숨을 내쉬었다. 어떻든 그날 레스토랑에서 나가 송이는 의준에게 넥타이도 사주고, 뮤지컬에도 끌고 갔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의준 혼자다. 그날처럼 의준을 끌고 다닐 사람도 없이.

“어머, 여기 계시네요? 어떻게 오셨어요? 누구 만나시려나 봐요?”

의준은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어떻게 된 거지? 의준은 혼란스러웠다. 송이가 눈앞에 와 있는 것이다.

“제 친구예요. 미국에서 왔어요.” 송이가 뒤에 있는 멀끔한 청년을 돌아다보며 말을 한다. “여기는 외사촌 오빠 친구분.” 송이는 다시 의준에게 고개를 돌리며 소개한다.

청년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민다. “안녕하세요.”

의준은 엉겁결에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미국에 있다는 교포 남자친구. 그러나 발음은 완벽한 한국인이다.

그러나 그뿐. 송이는 의준에게 미소를 한번 보여주고는 곧바로 남자를 끌고 창가 테이블로 갔다. 지난번 의준과 둘이 앉았었던 바로 그 테이블.

의준은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멍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

저 테이블은 의준이 송이와 단둘이서 앉았었던 자리였는데……. 그날 송이는 의준에게 아주아주 열심히 이야기를 해주었었지……. 생글생글 웃어가며…….

그런데 의준이 꿈결처럼 보냈던 그 시간들이 그리워 이렇게 돌아와서 그 꿈이 다시 한번 찾아와 주기를 바라며 바라보고 있었던 그 자리에 송이는 보란 듯이 다른 남자와 함께 와서 앉아 있는 것이다. 너무도 다정한 모습으로.

그날 밤 펜트하우스로 돌아온 의준은 처참한 마음이었다. 로마제국의 화려함과 데카당스로 꾸미고 싶었던 펜트하우스는 그러한 생각을 하기 전보다 더 황량하고 침침해 보였다. 데카당스로 망한 로마제국의 처참함 같았다.

의준은 몇 가지 없는 실내의 모든 물건들을 죄다 밖으로 내던지고 싶었다. 유리창을 깨뜨리고서라도. 그러면 밖에서 휭하니 부는 바람이 쳐들어와 펜트하우스를 황량한 벌판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런 뒤에 의준은 울부짖는 것이다. 버림받은 늑대처럼. Lupus.


Homo Homini Lupus

Lupus est Homo Homini


그 밤 의준은 밖으로 나갔다. 추웠다. 가지고 나온 목도리를 목에 칭칭 감았다. 걸었다. 한강 쪽으로 걸었다. 양화대교를 건너갔다. 공항로로 갔다.

눈발이 날리는 것 같았다. 가로등 불빛 속에서 가는 눈들이 흩어진다. 자정 넘어 호텔에서 나와 이탈리아 피렌체 한복판으로 흐르는 아르노 강 가를 혼자서 걸었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 강둑의 비탈을 따라 길게 이어진 풀숲 사이로는 연인들이 숨어서 속삭이던 소리들이 감미롭게 들려왔었다. 그러나 이 밤 겨울의 공항로 변에는 오직 날카로운 바람만 눈가루를 흩날리면서 달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3


봄이 되었다. 그동안 떠버리에게서 몇 번 전화가 왔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물론 음성메시지와 카톡이 오기도 했다. 그러나 확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화가 울리자마자 의준은 단번에 버튼을 눌렀다.

전화를 받는 순간 떠버리는 속사포로 말을 쏟아놓는다. 의준에게 너무 고립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냐며, 떠버리 자신에게는 기분전환할 거리가 많다고 했다.

“강남으로 나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 송이 남자친구가 한국에 왔다가 갔는데 알고 있어? 강남에서 한번 만났다며? 어떻게 지내? 재미가 너무 좋은가 봐…….”

다른 건 됐고, 송이 말이 나오자 의준은 마음이 산란해졌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름이어야 할 텐데 아직도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의준은 시답잖은 이야기들 늘어놓는 것 다 들어준 뒤에야 겨우 떠버리의 전화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화의 해방이 곧 마음의 해방은 아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의준은 또다시 스스로의 구속 속으로 들어갔다.

송이.

의준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펜트하우스의 너른 공간을 휘이 둘러보았다.

그 뒤 떠버리에게 전화를 했다.

“오, 현 실장, 생각이 바뀌었나 보네? 이리로 나올래?”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 아파트에 와줘. 송이하고.”

“좋지.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여기 공간을 인테리어해 줄래?”

의준의 조건은 딱 하나. 화려하게.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송이 마음에 들게’였다. 그리고 갈등이 생길 때는 송이 의견대로 하라고 말했다. 물론 마음으로만.

그 나머지에 대해서 의준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유럽으로 떠났다.

그때부터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고 펜트하우스는 궁궐이 되었다.

여기에서 또 하나, 펜트하우스 위에 한 층이 더 있었다. 펜트하우스 반만 한 공간. 그 공간 밖으로 나가면 옥상과 연결되며 그 한 편에는 기계실, 나머지는 옥상정원이 있었다. 31층에 해당하는 그 공간은 펜트하우스 내에서 계단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는데, 평소에는 거의 쓸 일이 없었기에 계단 위로 설치된 난간의 유리문을 닫아놓았다. 그리고 이번 인테리어 공사에서 그 공간은 손대지 말라고 했다, 그곳은 의준만 사용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기로 한 것이다.

의준은 여름이 막 시작되는 계절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의준은 변해 있었다.



4


송이는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가을학기를 위해 여름방학 때 미국에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하는 모양이다. 1년 만에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의준은 본래 화려하고 사치한 성격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새롭게 꾸며진 펜트하우스가 의준이 내심 기대했던 것에 한참 못 미쳤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의준이 자신의 취향을 미리 밝히지 않은 탓도 있지만, 요즘 아파트들의 지나친 서구식 지향 때문이기도 하다고 의준은 생각했다. 사실 의준은 단지 화려하게 꾸며달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그러니 의준의 속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값비싼 대리석과 그리스식 기둥, 게다가 실내정원 등등 나름대로는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았다. 가구도 서너 가지 주제에 맞춰 잘 갖추어 놓았다. 샹들리에를 비롯한 조명도 멋이 있었고. 뉴욕이나 런던의 고급아파트를 통째로 가져다 놓은 듯한 느낌.

그러나 한 가지가 빠졌다. 의준의 생각에 화려함의 극치는 한옥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옥의 지붕과 대문만 없을 뿐, 그 실내는 아주 깊은 맛이 도는 한국 전통적인 분위기와 그에 어울리는 도자기 등 소품들을 갖춰놓은 것이다. 그러나 전체를 다 한옥식으로 꾸미겠다는 것은 아니다. 전체 공간의 반만 그에 해당하면 된다. 그리고 그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나머지 반의 공간이 그리스식으로 이어진다면, 또한 그에 어울리는 소품들로 장식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의준이 마음속으로 꿈꾸고 있었던 자신의 궁궐이었다.

의준은 아무에게도 타박하지 않고 모든 인테리어를 다시 싹 바꿨다. 자신이 머릿속에 그리는 모습대로. 여기에다 거대한 백호 세밀화, 수십 마리의 백마 타일 벽화, 그리고 흰 눈으로 덮인 백두대간 추상화를 걸어놓았다. 도자기 종류는 백색과 옥색에 할 수만 있다면 대형으로 갖다놓았다. 그리고 한옥식 공간에는 전통 기와지붕 형태의 크리스털 간접조명으로 꾸몄다. 하지만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가능한 한 단순미를 지니도록 했다.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식 공간은 화려하도록 꾸몄다. 그러한 반면 무채색 흰색 점토의 테라코타 양식으로 장식한 벽과 조각상들을 가미해서 화려함 가운데에서도 차분함이 조화되도록 만들었다.

그림들은 단색 위주의 원시적인 느낌이 드는 것들로 골랐으나, 단 하나 전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모사품 그림이 가장 넓은 벽면 한가운데 덩그마니 걸려 있었다.


Quid est Veritas?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 니콜라이 게(Nikolai Ge, 1831~94)가 1890년에 완성한 177×233cm짜리 작품. 제목은 ‘Quid est Veritas?(진리가 무엇이냐?)’ 신약성경 요한복음 18장 38절에 나오는 구절이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트레티아코프 미술관(Tretyakov Gallery)에 소장된 작품. 그곳은 17~18세기의 러시아 성화들을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게 소장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그림은 아주 독특한 작품이다. 빌라도와 예수를 대비해서 그렸는데, 보통의 성화에서 예수는 성스럽고 환한 모습이고 그에 대비되는 악은 어둡게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당시 유대 지역 총독 빌라도는 환하고 풍채 좋고 후덕한 옆모습으로 오른손을 내밀고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반면, 예수는 비척 마르고 검은 머리와 수염은 산발한 채 남루한 긴 옷을 걸치고 (손은 뒤로 묶이고서) 어둡고 지친 몰골로 초라하게 서 있다. 이 두 사람은 아주 극적인 대비였다. 아마도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빌라도와 예수의 모습이리라.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당당한 체격의 로마 총독. 그에 반해 동족에 의해 민란을 꾸미는 역도로 고발당하고 온갖 모욕을 받은 뒤 강제로 끌려온 초라한 식민지 청년. 게다가 이 청년은 곧 모진 고문을 받고 십자가 처형장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 그림은 새로운 펜트하우스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의준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그것을 걸어놓은 것이다. 물론 모사품이다. 의준은 이번 유럽 여행 중 트레티아코프 미술관에서 그 작품을 본 뒤 한국에 돌아와서 한 미술가에게 똑같이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의준은 이 작품에 만족했다.

이렇게 해서 가을의 초입에 펜트하우스 리모델링은 끝났다. 상층만 빼놓고는.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가 빠진 것을 의준은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정지된 물체다. 엄밀히 말하면 죽은 것이다. 이들 사이를 흐르는 것, 즉 생명을 지닌 사람이 없다.

의준은 자신은 죽은 존재라고 늘 생각했다. 사치와 화려함을 동경하지만 그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 의준은 일종의 박제다. 존재는 하지만 생명은 없는 하나의 물체.

이 공간에 생명을 부여해 줄 주인공이 필요하다.

그녀, 송이.

하지만 아직은 알 수 없다. 송이가 이 공간에 생명을 부여해 줄지는.

의준은 여전히 뒤집힌 채 이젤에 놓인 ‘무도회’의 백치 같은 뒷면을 바라보았다. 리모델링 작업을 하던 사람들은 종종 그 그림을 다시 뒤집어놓곤 했다. 그러나 의준은 말없이 또다시 뒤집어놓았다. 그러기를 몇 번. 나중에는 모두 그것을 알고 내버려두었으나, 가끔 떠버리가 와서는 다시 뒤집어놓곤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의준은 그냥 내버려두었다가 떠버리가 떠나고 나면 다시 뒤집어놓았다.

하지만 의준이 ‘무도회’에서 송이를 찾는다는 사실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앞면과 뒷면이 반복되는 ‘무도회’는 의준에게는 일종의 진실게임과 같았다. 앞면에서도 뒷면에서도 송이를 찾지 못해 앞뒤를 무한반복하는 방황. 어느 쪽이 진실인지 의준은 모른다. 중후한 신사의 팔을 붙잡고 무도회장으로 들어가는 여인. 그런데 그 여인은 왜 고개를 돌려 다른 이를 찾고 있는 것일까? 누굴까, 그 사람은?

의준은 그 여인처럼 송이가 자신을 찾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의준은 손을 내밀어야 하는가?

그리고 나서 멀끔하게 생겼던 그 미국교포의 울음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남의 생명을 빼앗듯 다른 이의 사랑도 탈취하는 것이 의준의 운명이던가…….



5


의준은 미국으로 갔다. 볼티모어의 마이카 예술대학으로 가기 위해. 사과하려고. 진심으로.

의준이 유럽으로 떠난 뒤 펜트하우스 리모델링은 떠버리와 송이가 주도했다. 물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겠지만 그 둘이 리모델링 전 과정을 지휘하고 돈 지출까지 책임졌다. 송이는 의준이 돌아오기 직전에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그 둘이 3개월 동안 애쓴 모든 것을 의준이 뒤집어엎은 사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떠버리는 뜻밖에도 그에 대해 한 마디도 타박하지 않고, 오히려 의준이 새롭게 작업하는 것을 흥미 있게 지켜보기만 했다. 의준 역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변명하거나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송이에게는 직접 가서 설명해 주고 사과하고 싶었다.

뉴욕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동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필라델피아가 나오고 그 아래로 더 내려가면 볼티모어, 그 다음은 워싱턴이 된다.

의준은 인천에서 출발하여 같은 날짜 정오 조금 전에 워싱턴 DC 옆에 있는 버지니아 주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에서 내렸다. 그곳에서 항공기를 갈아타고 ‘볼티모어 워싱턴 인터내셔널 서굿 마셜 에어포트(Baltimore Washington International Thurgood Marsahll Airport)’라는 긴 이름의 볼티모어 공항으로 갈 수도 있겠으나 항공편이 원활하지 않아 택시를 타고 볼티모어로 갔다. 두 시간 동안 북서쪽으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환상과 같이 아름다웠다. 짙푸른 하늘에 깃털 같은 구름이 옅게 퍼져 있고, 그 사이 높은 하늘로 가끔 여객기가 지나간다. 밖의 공기는 맑고 상쾌했다. 계절은 가을이지만 날씨는 한여름이나 마찬가지였다.

호텔에 도착한 의준은 송이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한국에서 떠나기 전에는 연락하지 않았었다.

한 시간 뒤에 송이에게서 카톡으로 전화가 왔다.

“아니, 왜 연락도 없이 오셨어요? 작업하느라 톡 늦게 확인했어요.”

의준은 미리 알려주지 않고 와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직접 만나서 말할 것이 있어서 왔다고 대답했다.

“제가 그 호텔로 갈게요. 로비에서 전화할까요? 지금 준비하면 30분 안에 갈 수 있어요.”

의준은 로비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의준은 외국여행을 할 때 가능하면 값싼 숙소를 찾아간다. 그러나 이날은 볼티모어에서 가장 비싼 오성급 호텔 새가모어 펜드리 볼티모어(Sagamore Pendry Baltimore)로 정했다. 송이를 위해서. 이곳은 1914년에 문을 연 2층짜리 고풍스러운 호텔이다. 부둣가에 있으며 호텔 바로 뒤는 바다와 맞닿아 있다.

송이는 20분 늦게 도착했다.

“길이 너무 막히네요. 퇴근시간이라서 그래요. 제가 다니는 학교는 여기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있어요.”

송이는 숨이 가쁜 듯이 약간 헐떡거리며 로비로 들어왔다.

“많이 기다리셨죠?”

의준이 일어서서 송이 쪽으로 다가가는데, 송이 뒤쪽에서 안면이 있는 동양인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온다.

송이가 뒤돌아보더니 손을 들어올리며 빨리 오라고 재촉한다.

“저번에 한국에서 만났었죠? 제 남자친구. 이리로 오라고 전화했는데 시간 잘 맞췄네요.”

그날 저녁 세 사람이 어색한 저녁을 먹은 다음, 의준은 다음날 일찍 곧바로 워싱턴 공항으로 가서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마음속에선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6


눈이 하얗게 내렸다. 연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의준은 펜트하우스 상층에 올라가 일주일 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그곳에서 먹고 자고 생각했다. 한동안 펜트하우스와 상층을 오르내리며 생활했지만 이번처럼 일주일 내내 상층에만 틀어박혀 있었던 적은 없었다. 상층은 펜트하우스에 비해 넓이가 반밖에 되지 않지만 그래도 황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조그만 침대와 소파, 주방, 화장실 그뿐이었다. 텔레비전도 없었다. 의준은 하루 종일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서서 보기도 하고, 앉아서 보기도 하고, 누워서 보기도 하고.

의준은 일주일 동안 생각에 생각을 한 끝에 한 가지 결론을 냈다.

계 실장을 찾기로.

1년이 넘도록 경찰에서 엄청난 인력을 동원해 수사했어도 잡지 못한 저격범.

그러나 의준은 계 실장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 이름과 나이와 고시원과 기타 등등. 계 실장은 임무를 아직 완수하지 못했다. 그와 계약한 것은 아직 유효하다. 계약금을 주고받았으니 계 실장은 벗어날 수 없다. 악마와 한 계약도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의준은 고시원으로 갔다. 계 실장이 아직도 그곳에 살 리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우선 직접 가서 확인해 볼 생각이다. 옷을 허름하게 입고 고시원으로 들어가서 사무실 앞으로 갔다. 그러면서 곁눈으로 계 실장 우편함을 살펴보았다. 편지 하나가 꽂혀 있었다. 사무실의 조그만 창문이 열리며 한 아주머니가 얼굴을 내민다. 50대 초중반쯤 되어보이는 곱상한 중년여자였다. 생글생글 웃는 것이 애교도 있어 보인다. 의준은 아주머니와 방값을 흥정하면서 방을 보여달라고 했다. 아주머니가 사무실에서 나온다. 그 뒤를 따라 복도 안으로 들어가면서 의준은 편지를 슬쩍 들여다보았다.

이름이 달랐다.

“저, 혹시 여기 계씨 아저씨라는 분 사셨다고 하는데, 모르세요?”

“아, 계씨……. 지난봄에 나갔지. 어떻게 알우?”

“좀 알던 분인데, 여기가 잘해 준다고 했었거든요.”

“에구, 그 양반 사람은 참 좋은데 운수가 나빠.”

“왜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소식 못 들었어요?”

“네, 무슨……? 무슨 일 있었습니까?”

의준은 바짝 긴장해서 물었다.

“작년 가을에 공사판에서 떨어져서 고생 무척 했어요. 일용직이라 보험도 안 되고, 벌어놓은 돈도 없어서 겨우겨우 살아가다가 지난 봄에 시골로 내려가겠다고 하고 나갔는데……. 얘기 못 들었어요?”

“저도 공사판 떠돌다가 그분한테서 여기 산다는 말만 들었는데, 서로서로 떨어져서 일하니까 그런 건 몰랐죠.”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인데 조심을 했어야지…….”

아주머니는 의준도 조심하라는 듯이 쳐다보며 말을 한다.

“어디를 다쳤는데요?”

“다리하고 허리지 뭐. 높은 데서 떨어지면서 머리를 안 다친 게 다행이긴 하지만, 몸뚱이 하나로 사는 사람이 다리하고 허리를 다치면 다 끝나는 거지…….”

아주머니는 방 문을 하나 열어서 안을 보여준다.

“다 똑같아요. 방들이 다 그렇지 뭐. 이 방이 햇볕이 안 들어서 좀 춥기는 하지만, 여름엔 외려 더 좋지……. 오늘 아침에 한 사람이 보고 갔는데, 생각해 보고 내일 온다고 했으니까 빨리 결정하는 게 좋아요.”

“방값이 좀 쌌으면 좋겠는데…….”

“에구, 더 싼 거 찾으면 하숙이나 월세 방으로 가야지. 이 동네에선 여기보다 싼 데 없어요.”

아주머니는 다소 귀찮은 듯이 말을 한다.

“딴 데 좀 알아보고 다시 올게요.”

“그러세요.”

아주머니는 돌아서서 사무실로 걸어간다.



의준은 고시원을 나서면서 스스로를 나무랐다. 좀 일찍 찾아왔어야지…….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감탄을 했다. 저격장소에서 어떻게 감쪽같이 빠져나온 거지? 온 세상이 발칵 뒤집혔었는데. 그리고 다리하고 허리를 다쳤다……. 돈은 있었으니까 치료는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어떻게 된 거지?

그것보다도 그 난리 중에서도 고시원으로 돌아와서 봄까지 지냈다는 것이 참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그 전에 벌써 다른 곳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 그 당시 다른 곳으로 갑자기 사라졌으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의심 받을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차라리 평범하게 보통 때와 똑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공사판에서 다쳤다고 하며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이 더 안전했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것도 저격장소에서 감쪽같이 빠져나와야지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계 실장이 정말로 그곳에 가긴 간 걸까? 그리고 경찰에서 저격장소로 특정한 어린이놀이터의 높이가 5미터가 넘는 대형 복합 미끄럼틀에서 뛰어내리다가 다리와 허리를 다친 걸까? 그런데 그런 몸으로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긴 그런 정도니까 두 사람이나 저격하고도 지금까지 붙잡히지 않은 것일 테지만.

아무튼 이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계 실장은 안전하다는 것.

그럼 지금 계 실장은 어디에 있을까? 지난봄에 고시원에서 나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의준에게 보낸 편지는 그 고시원에 있을 때 보낸 것이다. 멀리 철원까지 가서 편지를 보낸 것을 보면 어쩌면 계 실장은 실제로는 많이 다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 눈을 속이기 위해 다쳤다고 한 것일 뿐.

그것은 그렇다 치고, 지금 계 실장은 어디에 있을까? 저격사건이 있은 지 1년이 넘었고, 그 고시원에서 떠난 지도 근 8개월이 된다. 물론 돈은 있을 테니 어디론가 가서 살아가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자, 계 실장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그는 살인청부를 받았다. 그리고 계약금을 받았으니 실행은 해야 한다. 그러나 저격 당일 결국 약속을 어기고 말았다. 그렇다면 계약이 파기된다. 그러면 계 실장으로서는 위험해지는 것이 아닌가? 경찰 때문이 아니라 청부를 준 사람들한테서. 그렇게 되면 당장에 몸을 숨겨야 한다. 그런데도 다리와 허리를 다쳤다고 하며 그 고시원에 몇 달 동안 남아 있었단 말이지? 복수를 당할 텐데……. 그들이 고시원을 알고 있잖은가.

그러나 의준은 계 실장이 청부를 한 사람이 의준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경위야 어떠하든 말이다. 그렇다면 의준이 세운 가정도 맞는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계 실장은 의준에게 편지를 한 것일 테고.

그동안 가정으로만 남아 있었던 것이 이제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또 한 가지도 가정에서 확신으로 변하게 된다. 즉, 계 실장과 그가 저격한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그날 밤 계 실장이 의준을 쏘지 않고 검사와 판사 부부에게 총구를 돌린 이유.

이 모든 것이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던 것이다.

의준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전율했다.

그것이 정말이었구나…….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의준은 온몸에 소름이 쫘악 끼쳤다.

계 실장은 계약을 지키러 다시 올 것이다!

의준이 지시한 대로.


***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

|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모두 내 탓이로소이다.

가톨릭에서 회개기도를 할 때 고백하는 말로서,

아카데미상 수상자인 앨릭스 기브니(Alex Gibney)가

2012년에 감독한 다큐멘터리 고발영화에서

‘Mea Maxima Culpa’를 영화명으로 사용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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