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준은 송이에게 전화를 했다. 거의 충동적이었다.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 후회했으나 그래도 끊지 못하고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벨이 몇 번 울릴 때까지 의준은 여전히 후회했다. 그러나 계속 벨이 울리자 이번에는 손이 굳어졌는지 귀에서 떼지 못하고 결국 발신중지 메시지가 나올 때까지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었다.
상대방은 의준의 번호를 안다. 떠버리가 호들갑을 떨어서 의준과 송이가 모두 각각 핸드폰에 상대방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두었으니까.
“이럴 때는 얼른 번호를 저장해 두는 거야. 시간 지나면 기차는 떠나요. 한 사람이라도 더 인연을 만들어두는 게 좋아. 우리 사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니까. 혹 아니, 이러다가 국수 먹는 일이 생길지…….”
송이는 팔짱을 끼고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의준은 가슴이 두근거렸고.
의준은 떠버리 말대로 어쩌면 진짜로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면서 며칠 동안 핑크빛 공상으로 젖어 있었다. 그런데 의준의 전화에 송이는 반응하지 않은 것이다.
일부러 안 받았을까……?
온갖 추측을 하느라 의준의 마음은 심란했다.
의준은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창으로 다가가서 어두운 바깥 덕분에 자신의 얼굴이 유리창에 실루엣처럼 비친 모습을 바라보았다. 반그림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그러나 의준은 그 얼굴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흑백 실루엣처럼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악마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얼굴을 오늘 처음 본 것은 아니다. 한밤중 주변 고층빌딩의 불들이 거의 꺼져 있어 마치 높이 솟은 납골당 같은 느낌을 주는 바깥을 배경으로 해서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실루엣을 의준은 종종 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초겨울로 가는 밤이 이제 겨우 저녁 8시를 막 넘기고 있는 중이었다.
창밖의 광경은 일부러 켜놓은 야경처럼 휘황했고, 창에 반사되는 그 빛의 잔치 속에서 겹치듯 얼비친 자신의 모습을 의준은 지금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바깥의 그림자가 안쪽의 인간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밖의 어둠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실루엣. 의준은 그것에 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내면 같은 그 실루엣을 의준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계속 노려보았다. 그러자 상대방도 지지 않고 밖에서 의준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리 가. 안 가면 죽어.”
실루엣이 말한다.
의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 나를 내다보는 거야? 나는 네 눈이 싫어. 너무 무섭거든.”
의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전화가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의준은 누군지 확인하지 않고 그냥 전화를 받았다. 송이였다.
“여보세요?”
기대했던 대로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의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 저 송이예요. 전화하셨어요?”
“…….”
“여보세요……?”
“…….”
“여보세요?”
의준은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손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핸드폰에서 가는 소리가 몇 마디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의준은 눈을 감았다. 그대로 잠시 가만히 있었다. 펜트하우스 안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고요해질 때까지.
그런 다음 의준은 눈을 떠서 다시 창밖을 보았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실루엣은 사라지고 빈 공간과 그 너머 휘황한 불빛들이 흘러나오는 창들만 있을 뿐이었다.
의준은 송이와 마주 앉아 있었다. 강남 삼성동 코엑스 무역센터 근처의 고급 레스토랑 창가 쪽 테이블.
‘송이’라는 이름, 단순명료하게 느껴졌다. 군더더기 없이 명확한 이미지. 그러면서도 어딘지 천진난만한 느낌.
“저도 그런 적 있었어요.”
송이는 미소 지으며 말한다. 강남역 커피숍 이층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마주쳤던 그 미소.
의준은 떠버리에게 부탁해서 송이와 만나게 되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놓고 무례하게 했던 것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사실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의 여자에 대해 동경하는 것이 잘못인 줄은 알면서도, 의준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다가 저도 모르게 갑자기 폭발하듯 송이에게도 전화를 했었고, 그 다음에도 참지 못하고 떠버리에게도 전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리고 나서는 지독히도 후회했었다.
하지만 막상 떠버리가 의준과 송이가 만날 수 있게 약속을 정해서 연락해 주자 의준은 안도가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온갖 공상을 하며 이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나자 송이는 자신이 더 무안했는지 얼굴을 밝게 하면서 그 전화에 대해서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먼저 전화해 놓고 그냥 시시해서 끊어버리는 거 있죠. 미안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재미있기도 했었어요. 사람들이 다 그런 경험 있었을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마치 여고생들이 모여 수다 떨듯이 송이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송이의 얼굴은 참 밝았다.
그런 말을 듣자 의준은 자신이 어딘지 약간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가벼워졌다. 제대로 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상받는 듯한 마음. 며칠 동안 후회하고 자책하고 마음 졸이고 했던 모든 것이 스르르 덮어지는 것 같았다.
“평소에 뭐 하세요?”
송이는 의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을 한다. 묻는 것이 아니다. 말을 하는 것이다.
아니다.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말을 들으려 하는 것이다. 의준의 말을 듣고 싶어하는 것. 의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의준을 할 말이 없었다. 이런 경우를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떠버리가 알려준 대로 시간 맞춰서 나왔을 뿐이다. 이곳까지 오는 택시 안에서도 의준은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했다. 여자를 만나면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그저 펜트하우스에 새로이 갖다놓은 커다란 프레임만 생각하고 있었다. 혹 나중에라도 여자에게 그것을 들키면 어떻게 하나 하고.
의준은 여자에게 전화를 한 다음 마음이 지독히도 불안정했었다. 전에는 없던 일이 요즈음 하나둘 생기는 것이었다. 의준은 이렇게 이틀 동안 불안한 마음으로 보내다 문득 하나가 생각났다.
여자 그림.
의준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책들을 뒤져 두 권을 찾아서 소파에 가지고 왔다. 미국과 유럽을 돌아다닐 때 예술에 대한 책을 많이 사왔다. 그중에서 보았던 명화 한 점이 생각났던 것이다. 두 책을 탁자에 펴놓고 의준은 기억을 되살리며 페이지를 넘겼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하나는 《뮤제 도르세이 박물관(The Musée d’Orsay)》의 153쪽, 또 하나는 《패션(Fashion)》의 215쪽에 각각 실려 있는 그림. 제목은 영어로는 ‘The Reception’이었으나 한국에서는 흔히 ‘무도회’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크기는 88.9×50.2cm, 아래위로 길쭉한 그림이다. 이 그림을 의준은 파리에 갔을 때 뮤제 도르세이 박물관에 가서 직접 보았다.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이 넘쳐나자 파리에서 꽤 떨어진 센 강 옆의 가르 도르세이(Gare d’Orsay) 기차역을 개조해서 만든 박물관이다. 루브르의 쌍둥이 박물관인 셈이다. 이 박물관은 그 유명한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많이 소장되어 있어서 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상당히 잘 알려진 곳이다.
‘무도회’를 그린 자크 조세프 티소(Jacques Joseph Tissot, 1836~1902)는 프랑스 태생이지만 한때 영국 런던에서 살았던 덕에 제임스 티소(James Tissot)라고도 알려져 있다. 특히 런던 시절에 아일랜드 출신의 바람둥이 이혼녀 캐슬린 뉴턴(Kathleen Newton)을 만나 6년 동안 불같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가 2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티소는 상당한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무도회’라는 작품은 1878년, 즉 캐슬린과 한창 열애 중일 때 그린 것으로서, 머리가 하얀 신사와 함께 젊은 미녀가 무도회에 들어가는 장면이다. 밝고 화려한 주황색 드레스를 입고서 역시 같은 주황색의 커다란 쥘 부채를 활짝 편 채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한 여자의 모습. 그림은 전체적으로 밝은 느낌인데, 특히 드레스 아래쪽이 아주 화려한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어서 당시의 패션 유행을 짐작케 해주고 있었다.
사실 이 그림이나 화가인 티소는 미술사적으로는 그렇게 주목받는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의준은 예술책들을 페이지마다 꼼꼼히 들여다보는 성격이어서 어떤 장면이나 물건을 보았을 때 여러 책들 속에 수록된 그림들이 곧잘 연상되곤 했다.
의준은 두 권의 책에서 모두 ‘무도회’를 찾아낸 뒤 두 그림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두 권을 나란히 펴놓고서. 한 권은 19세기의 드레스 패션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 한 권은 도르세이 박물관의 소장품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으나, 의준은 옆모습이 그려진 그 작품의 여자에게서 무엇인가 이미지를 떠올리려 한 것이었다. 사실 이 작품과 비슷한 풍의 한국 그림이나 사진도 찾아볼 수 있겠으나 의준은 한편으로는 꽤 게으른 사람이라 자기 영역 내에서 벗어나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기를 꺼려하는 성격이 강하다.
어떻든 의준은 그 ‘무도회’ 그림에서 송이의 이미지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그 책을 들고서 사진 전문가에게 갔다. 책에 인쇄된 그 그림을 실제 작품 크기로 확대해서 정교하지는 않더라도 입자가 거칠면서도 예술적인 감각이 엿보이는 큼직한 액자 프레임으로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다. 그런 뒤 펜트하우스 한쪽에 이젤을 갖다놓고서 그 프레임을 세워놓았다.
의준은 그 사진을 몇 날 며칠 바라다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그 사진에서 송이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 의준은 떠버리에게 전화를 해서 송이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 결과가 오늘 송이와 마주 앉아 있게 된 것이다.
“그 펜트하우스에서만 늘 지내시는 거예요?”
“…….”
“지루하지 않으세요?”
다른 때는 몰라도 오늘 의준은 지루하지 않았다. 눈도 즐겁고, 귀도 즐겁고, 마음도 즐거웠다. 의준의 영혼 속 깊은 곳에 있는 어둠만 빼놓고는 모든 것이 즐거웠다. 그러나 항상 문제되는 것은 바로 그 어둠이었다. 그놈은 늘 의준의 목에 추를 매달아 놓고 시도 때도 없이 슬그머니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2
두 사람이 레스토랑에서 나온 뒤 송이는 의준을 근처 백화점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넥타이 두 개를 사주었다. 의준은 노타이에 연청회색 외이셔츠와 짙은 남청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바지는 좀처럼 입지 않던 진회색. 그래서 송이는 영국 이튼스쿨 학생 같다고 했다. 재킷 단추가 반짝이는 금빛이 아니어서 좀 아쉽다고 하면서. 의준의 양복 단추는 무광의 금빛에 검은 무늬가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튼스쿨 학생들이 그런 양복을 입고 다니는지는 알지 못한다. 느낌이 그렇다는 뜻이겠지.
이튼스쿨의 원래 학교명은 이튼 칼리지(Eton College)이지만 영국에서도 흔히 그렇게 부른다. 잉글랜드 버크셔 주 이튼이라는 도시에 있는 사립중고등학교. 1440년에 잉글랜드의 헨리 6세 국왕이 세웠다고 하며, 남학생만 입학할 수 있다. 지금까지 영국 총리만 20여 명을 배출했다. 학생 수는 1,200명 정도 되고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한다.
송이가 사준 넥타이는 와이셔츠와 어울리는 환한 청회색이 하나, 그리고 또 하나는 붉은색과 검은색 빗선 무늬가 강렬하게 대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둘 다 의준의 취향은 아니어서 마음속으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미술학도가 목에 직접 대주며 골라주는 것을 마다할 수도 없어서 의준은 머뭇거리면서도 받고 말았다.
그 뒤 송이는 자신이 아는 유명한 커피숍이 있다며 그리로 가자고 했다. 의준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끌고 간 것이다. 올림픽아파트 조금 지나 옛 유럽풍의 건물에 있는 커피숍이었는데, 실내는 생각보다는 허름했다. 하지만 강남에서 제일 유명한 오스트리아인 바리스타가 즉석에서 손님 취향에 맞게 직접 커피를 만들어 주어서 인기가 많다고 한다.
“아주 세밀히 말해도 돼요. 평소 커피 취향이 아니라 특별히 오늘 어떤 향이나 맛을 느껴보고 싶다고 해도 되고요.”
송이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을 한다.
그렇지만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의준으로서는 그러한 모든 과정이 번거롭게 느껴지기만 했다. 그 커피나 저 커피나 의준에게는 죄다 쓸 뿐이었다. 향기는 그런대로 좋았지만.
어릴 때 가끔 마셨던 숭늉 냄새가 문득 의준의 코끝으로 지나갔다. 그 냄새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바리스타가 코앞에서 미소 지으며 기다리고 있다.
“추억을 떠올려도 됩니다. 어릴 때 고향에서 맛본 구수한 맛도 괜찮아요…….”
유창한 한국어.
“숭늉.”
의준이 저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바리스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는다.
“숭늉 좋아요. 할머니가 끓여주시는 그 맛. 아주 구수하죠. 그런데 숭늉 중에서도…….”
“시체 맛.”
의준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말을 툭 던졌다.
바리스타의 눈이 크게 떠진다.
“오우, 좋아요. 감꼭지 말이죠? 그런데 그거 잘못 먹으면 부작용 생기는데.”
의준은 무슨 말인지 몰라 바리스타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맛? 사람 시체, 감꼭지 시체?”
바리스타의 눈이 가늘어진다. 재미있는 모양이다.
“시체 몰라요, 시체? 한약재잖아요, 감꼭지. 그러니까 감꼭지는 시체(柿蔕), 감 열매는 시자(柿子), 곶감은 시병(柿餠). 한국말 몰라요? 아니, 한자 안 배웠어요?”
바리스타가 입이 이만큼 커지며 싱글벙글한다.
“그럼 귀신도 모르겠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당귀의 머리는 당귀두(當歸頭), 몸통은 당귀신(當歸身), 뿌리 끝 잔털은 당귀미(當歸尾). 우리 시골 할머니들은 그냥 귀두, 귀신, 귀미 이렇게 부른다니까.”
의준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송이는 옆에서 웃기만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오스트리아인은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적이라고 소문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시골 할머니인지, 니네 시골 할머니인지…….
이렇게 투덜거리면서 의준은 정말로 시체 맛 나는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게 되었다. 진짜 시체 맛이었다. 씁쓰름한 그 맛. 퀴퀴하게 썩어가는 맛.
토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3
송이는 뮤지컬을 하나 보자고 한다. 연말과는 좀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레미제라블’이 앙코르 공연을 하고 있다고 한다. 프랑스 배우들이 나와서 직접 프랑스어로 부른단다. 게다가 런던에서 처음으로 불렸던 영어판이 아니라, 1980년 파리에서 초연되었던 클로드-미셸 쇤베르(Claude-Michel Schönberg) 원작의 곡을 그대로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아시아 투어 중이라나. 특히 그 뮤지컬 중 자베르 형사가 부르는 자살 넘버 ‘Noir ou Blanc(흑과 백)’이 기가 막히게 좋다고 하는 것이다.
넘버? 번호를 말하는 것인가? 그런데 자살하는 데 웬 번호가 들어가는 거야?
“여기에서 ‘넘버(number)’라는 건 뮤지컬 작품에 들어가는 곡을 뜻하는 거래요. 좀 색다르죠?”
송이는 의준이 묻지 않아도 그 얼굴만 보고서 알아차렸는지 미리 설명을 해준다. 멍하니 쳐다보는 그 표정에서 문화에 문외한인 것이 다 드러나는 모양이다.
아니, 그런데 프랑스어로 부른다는 거잖아. 그걸 다 알아들어?
이번에도 송이가 먼저 설명을 해준다.
“걱정 안 해도 돼요. 자막이 나오거든요.”
점쟁이인가……. 의준은 좀 무안한 느낌이 들었다.
“무대 양쪽에 큰 스크린이 있는데, 거기에 다 번역이 되어 나와요.”
아니, 영화도 아니고…….
“영화 자막은 단순하잖아요. 그런데 연극에서는 달라요. 어떤 때는 글자도 알록달록하고, 스크린 바탕도 극 장면에 따라 달라지기도 해요.”
평소 문화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던 의준은 뮤지컬이니 하는 것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 특히 음악의 세계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송이와 함께하는 것이라면 무엇인들 마다하랴. 프랑스어면 어떻고 독일어면 어떠냐. 그뿐이랴. 자막이 안 나오면 어떻고, 뮤지컬에서 넘버가 무슨 뜻인지 몰라도 상관없다. 송이와 함께 있는데 그런 거 아무려면 어떠냔 말이다.
그런데도 의준은 하마터면 졸 뻔했다. 웅장하게 울려나오는 오케스트라 음악과 노래가 극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중에서도 눈이 감겨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의준은 스스로가 참 장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뮤지컬이 끝나자 밤 10시가 넘었다.
두 사람은 국립극장에서 밀려나오는 사람들에게서 빠져나와 말없이 거리를 걸었다. 곳곳에 성탄장식으로 화려한 감은 있었으나 건너편 아파트촌의 겨울밤은 쓸쓸함 그 자체였다.
송이가 핸드폰 앱으로 부른 택시가 다가왔다. 그 차를 타고 송이네 아파트로 갔다. 두 사람은 내려서 잠시 서성였다. 그러나 그뿐. 송이가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자 의준은 갑자기 혼자가 되고 말았다.
의준은 펜트하우스로 돌아와 이젤 앞에 섰다. 서양 여자. 19세기 사람. 그 속에서 21세기 한국 여인을 찾을 수 있을까?
그 여자 송이는 남자친구가 있다고 한다. 남자친구란 어떤 의미일까? 애인?
부모형제 없는 미국 땅에서 만난 남자. 힘든 유학생활에서 외로움을 달래주는 사람. 얼마나 가까울까? 지금은 잠시 떨어져서 한국에 와 있지만 연락은 자주 하겠지……. 서로가 외롭고 그리울 테니.
그런데 오늘 의준은 그 여자와 저녁 늦게까지 함께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오늘 같은 날이 다시 올 수는 없겠지…….
의준은 이젤에 올려놓은 서양 여자의 앞모습이 보고 싶었다. 이젤로 다가갔다. 프레임을 들어 뒤집어놓았다. 그러나 여자의 앞모습은 없었다. 그 대신 밋밋한 플라스틱 뒷면만 보일 뿐이었다. 프레임을 뒤집어놓는 순간 여자가 사라진 것이다. 생명까지도. 상상까지도.
의준은 또다시 창가에 가서 섰다. 새벽 2시. 주변의 아파트 불빛들은 거의 꺼져 있었다. 시커먼 공간 중간중간에 벌레 먹은 웜홀 같은 모양으로 빛의 구덩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송이.
만나고 온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 또다시 보고 싶었다. 이 밤, 이 창가에서 저 웜홀 대신 사랑을 여자와 함께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순간 송이는 또다시 남의 여자가 되고 말았다.
4
의준 앞으로 온 편지 세 통. 둘은 발신인이 없고, 하나는 발신인이 있지만 사실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세 편지는 같은 사람이 보낸 것이다.
앞의 두 편지는 어떤 의미를 담은 것인데, 그 의도는 아직도 알 수 없다.
마지막 편지는 의준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의준의 10년 전 행위를 아는 것 같았다. 적어도 금학산에 대해서는. 그렇다면 어디까지 아는 것일까? 혹 모두 안다면 왜 경찰에 가지 않은 것일까? 경고인가? 협박인가?
그리고 또 하나, 가장 중요한 점. 의준이 묘지를 찾아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계 실장…….
그런데 세 번째 편지에서는 의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이 묘지를 언급했다.
무슨 의도일까?
혹 다음번에도 편지가 또 올까? 만일 그렇다면 계 실장의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무슨 의도인지 모르지만 빨리 알려줘. 이런 식으로 놀리지 말고.
정말로 또다시 편지가 왔다. 이번에는 발신인이 없었다. 우표에 찍힌 소인을 보니 서울양재동우체국이었다.
앞서 온 세 편지는 각각 다른 도시였다. 부천상동우체국, 고양덕양우체국, 그리고 세 번째 금학산 편지는 철원근남우체국이었다.
참 부지런히도 돌아다니는구나. 그러나 멀리 가지는 않았다. 제일 먼 곳이 철원. 가장 가까운 곳은 서울 양재동. 다음번에는 여기 서교동이 되려나.
어떻든 계 실장은 경찰에 갈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게임을 하려는 것이겠지. 즐기려는 것일까? 아니면 그 자신도 살인범이어서 경찰을 피하는 것일까? 그래도 익명으로 신고할 수는 있을 텐데 그러지 않는 이유는……? 의준도 계 실장을 저격범으로 신고할 수 있기 때문에?
재미있다.
같은 배는 아니지만 비슷한 배를 타고 있는 두 사람. 서로 적인가, 동지인가……?
의준은 봉투를 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없었다. 혹 봉투 안쪽에 무엇인가 써놓은 것은 아닌가 해서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어서 펼쳐보았다. 그러나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투명잉크로 써놓은 것은 아니겠지?
추리소설?
아무튼 갈수록 재미있어진다.
고민할 필요 없다. 계 실장 쪽에서 필요하면 또 보낼 것이다. 의준이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는 알려줄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리자.
의준은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잠 속에서 갑자기 계 실장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정말 어떻게 된 것이지? 저격범이든 아니든 아직도 계 실장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다. 물론 편지를 보낸 사람이 계 실장이라고 확신은 하지만, 적어도 편지에서 자신을 밝힌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네 번째 편지를 통해서 계 실장은 간접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알려주었다. 의도적으로.
그리고 다섯 번째 편지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
무슨 뜻인가?
항복? 그럴 리가 없지. 계 실장이 의준에게 항복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 저격사건 날 밤 틀림없이 계 실장은 이곳에 왔다. 그리고 두 사람을 쏘았다.
처음에는 의준을 저격하려 했겠지. 그러나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오래된 삼각관계가 나타나는 바람에. 옛 연인과 상대방 남자. 그래서 저격대상이 순간적으로 바뀌었다. 그런 뒤 미리 준비해 놓은 도주로를 따라 사라졌을 것이다.
연기처럼 사라진 저격범. 이것 때문에 정부는 곤란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언론마다 비판하고 나섰으니까. 아니, 온 국민이 조롱하고 나섰다. 외국에서까지. 그만큼 그 사건은 온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계 실장은 마음만 먹으면 어떤 식으로든 의준에게 연락할 수 있을 것이다. 전화는 꺼놓았으니까 편지로라도. 지금 의준에게 보낸 편지처럼 익명이 아니라 실명으로.
의준은 침대에서 일어나 라이플과 핸드폰을 숨겨둔 벽 공간으로 갔다.
그곳을 열고 핸드폰을 꺼내들고서 한참 망설였다. 켤까, 말까…….
의준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켰다. 그러나 부재중 전화는 하나도 없었다. 카톡을 비롯한 어떠한 메시지도 없었고. 이메일은 서로가 모르니까 보냈을 리도 없다. 물론 당연한 것이겠지만, 의준이 전화를 걸었거나 메시지를 보낸 기록도 없었다. 그야 당연하지. 전화 자체를 꺼내보지도 않았으니까.
이제 의준은 새로운 갈등을 해야 했다. 계 실장에게 전화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지금 새벽 3시 반.
의준은 계 실장과의 약속을 깨고 카톡을 보낼까 생각했다.
의준은 자기 자신이 답답해졌다. 어느 하나 빨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망설이기만 하는 것이 한심해서.
의준은 심호흡을 한 뒤에 핸드폰을 다시 벽 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침대로 가다가 이젤을 돌아다보았다. 그림은 여전히 뒤집힌 채로 있었다.
5
의준은 편지 네 통을 탁자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받은 순서대로 왼쪽에서부터 차례로.
Homo Homini Lupus
Homo Homini Deus
내가 묻힐 곳은 금학산
비어 있는 편지
의준은 문득 다섯 번째 편지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혹시 편지 대신 의준에게 저격 총탄을 배달해 주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또 한 가지에 생각이 미쳤다. 의준이 자신을 저격해 달라고 했다는 사실을 계 실장은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그래서 편지를 보내는 것일 테다. 자신이 안다는 사실을 의준에게 알리려고. 일부러 강석민 이름을 넣어서. 강석민에 대해서는 조금만 알아보면 충분히 찾아낼 수 있는 일이다. 의준의 가정에서 불행한 일이 벌어졌을 때 언론에서도 언급했었던 부분이니까. 따라서 편지에 한탄강 래프팅에서 제일 가까이에 있는 금학산을 언급한 것은 강석민의 실종과 관련해서 조금만 확대시키면 충분히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의준은 생각했다.
다만, 편지를 보낸 의도는 모르겠다. 막연히 짐작이 가기로는 어쩌면 복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일 뿐. 의준이 자신에 대한 저격을 계 실장에게 지시했고, 그것을 계 실장이 받아들였던 사실. 그런데도 계 실장이 의준을 배신한 것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분노하는 마음. 그것을 오히려 의준에게 되갚아주려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의준은 계 실장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계 실장을 이용한 것은 오히려 의준 자신이니까. 지금 이 시점에서 의준은 계 실장이 익명으로 보내는 편지에 대한 의문보다는 계 실장의 안전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러면서도 의준은 내심으로는 다섯 번째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말연시가 지나고 1월도 중순이 되었다. 그동안 의준에게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편지도 오지 않았고, 저격범이 잡혔다는 소식도 없었으며, 송이를 만나지도 않았다. 떠버리에게서 몇 번 연락이 오긴 했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아마도 송이와의 관계가 궁금했을 것이다. 그러나 떠버리는 그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물어본다 해도 의준으로서는 대답할 것이 없긴 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매일 송이를 그리고 있었으나 현실에서는 아무런 일도 없었으니까. 어쩌면 떠버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묻지 않았을 수도 있다.
며칠 만에 또다시 떠버리가 전화했다.
“스키 타러 갈래? 큼지막한 콘도 하나 가지고 있거든. 우리 집에서.”
“나는 스키 못 타.”
“배우면 되지. 좋은 코치 내가 잘 아니까 걱정 마. 유치원 애들도 타는데.”
“원래 운동소질이 없어서…….”
“스키장에 스키만 타러 가나. 한바탕 노는 거지. 내 친구들 소개해 줄게. 송이도 오라고 하고.”
어째 송이 이름이 안 나오나 했다.
“사양할게.”
이 뒤로도 몇 마디 더 나누다가 의준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또다시 전화가 왔다. 떠버리가 귀찮게 구려나 생각하며 번호를 보니 송이였다.
의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계속해서 울리던 벨소리가 끊어지고 나자 드넓은 펜트하우스엔 갑자기 적막감이 감돌았다. 그러잖아도 텅 비어 있었던 곳에 갑자기 저 먼 곳의 우주가 처들어와서 가득 차고 말았다. 아무것도 없는 진공의 빈 공간.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것이 가능할까?
물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의식도 없고, 의준도 없고, 송이도 없고, 저격범도 없고, 생각도 없고, 편지 속 내용도 없고, 이 밤도 없고, 모든 게 없는 것…….
이러한 부재(不在)가 가능한 것일까?
***
nequaquam vacuum | 부재(不在)는 존재하지 않는다.
구약성경 신명기 15장 13절의 라틴어 번역
‘et quem libertate donaveris, nequaquam vacuum abire patieris’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에서 나온 말로서,
이 구절만 떼어서 말할 때는 위와 같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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