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준은 자신의 상황이 점점 복잡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송이와 참정루는 공상 속에서만 연결되었던 것이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 공상에서는 아무리 복잡하게 얽혀 있어도 언제든지 접으면 끝난다. 그러나 현실이 되면 몸과 마음이 늘 시달려야 한다. 그리고 의준의 처지에서는 어떠한 일이든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없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있기 때문에. 따라서 의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깊은 상처를 안겨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의준은 한송이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헛꿈을.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한 고통으로 끝날 일을. 참정루 뒤에 있는 참혹한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는 그 길을 열어준 것이다. 지금까지도 가시밭길을 걸어왔을 사람에게 더 힘든 결과를 안겨주게 되는 것. 그녀보다는 명송이처럼 꽃길을 걸어온 사람에게 그 길을 주는 것이 공평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제는 되돌릴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참정루에서 하룻밤 잔 한송이에게서 어떻게 그 기억을 지울 수 있단 말인가.
이것 말고도 의준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아주아주 골치 아픈 일들. 계 실장, 심 여사, 키 작은 노인……. 그런데도 요즘 의준은 다른 데다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자신의 운명과 관계된 일은 외면한 채.
송이의 귀국파티를 열어준 다음날 의준은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감춘 채 계 실장의 고시원 근처를 훑어보았다. 겨울이라서 그런 것이 가능했으리라. 해가 진 뒤 두꺼운 옷과 목도리, 털모자, 마스크 등을 총동원해서 변장 정도가 아니라 변신을 한 뒤 그곳에 가서 골목골목 돌았다. 두 번. 그러나 그 노인은 찾을 수 없었다. 혹 밤이라서 노인이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물론 고시원에는 가지 않았다. 심 여사에 대해서는 다음에 조사해 볼 생각이었다.
그 다음날 밤 의준은 다시 그곳을 찾았다. 한밤중 새벽 2시였다. 일부러 그 시간에 간 것이다. 어둠의 인간들에게 어울리는 시간, 그 차디찬 음울을 맛보기 위해서.
하늘은 잔뜩 흐려 별은 보이지 않고 바람만 몹시 불었으며, 눈은 오지 않았지만 아주 조금 가는 눈발이 가끔 흩날리는 정도였다. 옛 영화나 소설 같았으면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에 간판들이 흔들리고 전깃줄이 피잉피잉 소리내며 울었을 법한 그런 밤, 텅 빈 그 고시원 거리를 구석구석 몰고 가는 바람을 따라서 의준은 걸었다. 그리고 웃기게도 의준은 아리아를 떠올렸다. 음악에 대해서는 까막눈에 가까운 문외한이요 지독한 음치인 의준에게 이 한밤중 아리아의 운율이 머릿속에 흐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한겨울 밤 별도 없이 추운 하늘 아래 오직 매서운 찬바람만 몰아치는 음울한 밤에.
유랑악단의 초라한 무희인 미뇽(Mignon)이 단장에게 채찍으로 맞을 때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구해준 젊은 수도사 빌헬름 마이스터(Wilhelm Meister).
미뇽은 그에게 감사하며 노래를 한다.
Connais Tu Le Pays? (그 나라를 아시나요?)
그대는 아시나요, 레몬 꽃 피는 그 나라를
짙은 잎새들 사이로 황금빛 오렌지 불타듯 빛나고
살랑이는 실바람 푸른 하늘에서 불어오며 구스베리 익어가고 월계수 높이 자라는 곳
그대는 아시나요, 그 나라를
그곳으로, 그곳으로 그대와 함께 가겠소, 사랑하는 사람이여……
프랑스 작곡가 앙브루아즈 토마(Ambroise Thomas, 1811~96)가 지은 아리아. 이 황량한 겨울밤 아리아의 가사가 의준의 머릿속을 맴돌다니.
그리고 그 아리아에서는 분명히 ‘그대는 아시나요, 레몬 꽃 피는 그 나라를’이었으나, 이 밤 의준에게는 ‘그대는 아시나요, 그 따뜻한 남쪽나라를’로 들려오고 있었다.
의준은 추웠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그리고 영혼이…….
2
송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다급했다.
“어떡해, 오빠…….”
아니, 뭐, 뭐가?
“송이가, 송이가 사람을 치었대? 어떤 할아버지를…….”
이게 무슨 소리야? 송이, 그러니까 한송이겠지 물론. 그 송이가 할아버지를 치다니? 그런데 한송이가 차를 몰고 다녀?
“아니, 병원차래.”
그 병원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낡은 SUV가 있었는데 원무과 직원들뿐만 아니라 간호사들도 급한 일이 있을 때 사용한다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이 어린 간호조무사 중에서는 한송이만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바쁠 때 몇 번 한송이가 그 차를 운전한 적이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마침 수간호사가 급히 갈 곳이 있다며 한송이에게 차를 병원 현관 앞에 가져다 놓으라고 했다. 그래서 주차장에 가서 차를 가지고 나가는데, 주차장 입구까지 갔을 때 병원 근처에 사는 어떤 할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나 뛰어서 차 앞을 가로지르려 하는 바람에 그만 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급브레이크를 밟아서 다행히 많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많아서 걱정이라고 한단다.
송이는 한송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전화를 했다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며 의준에게 전해준 것이다.
그 주차장 입구가 늘 문제구나. 하긴 그곳에서 가장 먼저 사고를 일으킨 것은 바로 의준이었지. 자전거 타고 가다가 한송이와 부딪칠 뻔해서 넘어졌으니까. 그런 다음 바로 그 장소에서 송이가 한송이를 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송이가 다른 사람을 쳤고. 모두가 바로 그곳 똑같은 장소에서.
젠장, 내가 시작한 곳에서 연속으로 일이 일어나는구나.
의준은 마음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의도적으로 하면 안 되는 거야. 그거 다 벌 받아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젠장…….
그건 그렇고……. 에고, 한송이는 무슨 죄냐? 매번 한송이는 다 끼어 있으니.
의준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송이가 자기 대신 한송이에게 가봐 달라고 했는데, 자신이 가서 뭘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한송이가 피해자도 아니고 가해자인데 뭐라고 위로를 해주어야 하는 것일까?
그래도 부탁을 받았기에 의준은 천천히 병원 쪽으로 걸어갔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태세다. 며칠 동안 하늘은 계속 그런 상태였다. 저기압으로 세상을 꽉꽉 누르고 있는 하늘. 에이, 눈이라도 콱 쏟아져라! 모든 것 죄다 덮어버리게.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
참 편리한 생각이구나. 의준은 생각했다. 리셋 한번 해서 다시 시작되는 세상, 그런 것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
의준은 문득 어젯밤 매서운 바람 속에서 머릿속을 맴돌던 아리아가 다시 생각났다.
미뇽은 빌헬름에게 애원하고 있다. 자신을 데리고 도망가 달라고. 젊고 돈 많고 야심만만한 빌헬름. 질투로 눈이 멀어 성에 불을 지르는 미뇽. 그러나 결국 빌헬름과 미뇽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리고 알고 보았더니 미뇽은 성주의 잃어버린 딸이란다.
지금 의준의 현실에서 빌헬름과 미뇽은 누구일까?
혹시 의준과 한송이? 한송이가 성주의 딸인가? 현실에서 성주의 딸은 명송이가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의준의 머릿속에서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학창시절(Wilhelm Meisters Lehrjahre)》을 각색해서 만든 희극 오페라 《미뇽》의 장면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주인공인 빌헬름은 학창시절에 공부는 안 하고 연애만 잔뜩 하더만 뭐. 소설 제목을 ‘학창시절’ 대신 ‘편력시절’이나 ‘연애시절’로 번역한 책도 있는 것을 보니 뻔하지.
이 작품은 음악도 잘 모르고 오페라는 더더욱 모르는 의준이 어쩌다 보게 된 몇 편 안 되는 오페라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의준은 미뇽이 애절하게 부르는 아리아가 좋았고, 또한 오페라 마지막 장면에서 극적으로 역전되는 미뇽의 인생도 좋았다. 그 피날레는 마치 의준 자신이 미뇽이라도 된 듯이 가슴이 설레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장면은 평소 얼음장처럼 차가운 의준의 마음에 하나의 큰 위로였으며, 또한 의준이 꿈꾸는 통쾌한 역전이기도 했다. 의준이 저지른 모든 악행에서 벗어나 미뇽이 꿈꾸던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미뇽과 같은 열정적인 여인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
헛꿈인 것을 알면서도 의준은 곧잘 그 환상에 빠져들었고, 또 그 아리아를 떠올리곤 했다.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아가기 위해서…….
의준은 정형외과에 도착했다. 그러나 병원 안은 평온했다.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했다. 하긴 매일 여러 환자가 드나드는 병원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병원차에 치었다고 해서 난리통이 벌어질 리는 없지. 그저 환자 한 사람일 뿐일 테니까.
의준은 일부러 한송이에게 전화하지 않고 병원 안으로 어슬렁 걸어들어갔다. 의준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보고 웃어준다. 의준은 혹 한송이를 만날까 하고 3층 입원실 쪽으로 올라갔다가 사람들하고 마주치는 것이 내키지도 않고 답답하기도 해서 계단통으로 나갔다.
어디선가 희미한 담배 냄새.
의준은 아차 싶었다.
창문이 살며시 닫히는 소리. 아니, 느낌. 저 위쪽에서 아주 약한 어떤 소리가 들려왔는데, 의준은 그것이 조심스럽게 창문 닫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준은 숨까지 멈추고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아차 하고서 일부러 부스럭 소리를 좀 내고 아주 천천히 계단 위쪽으로 발을 옮겼다. 위에서는 아주 조심히 발을 내디디며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더니 4층 계단 문이 열리면서 다시 살짝 닫히는 소리. 그 중간에 약간 싸아 하는 울림 같은 것이 느껴졌다. 병원 내부 복도의 닫혀 있었던 공기가 갑자기 계단통의 공기와 통하면서 내는 울림 같았다.
의준은 얼른 5층 계단참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창밖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혹시 연기 같은 게 올라오지는 않는지 한동안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문득 한 가지 어색한 것을 느꼈다.
뭐지……?
의준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의준은 창밖을 좀 더 살피다가 이젠 됐다 싶어 몸을 돌려서 계단 문을 통해 병원 내부로 들어갔다.
의준은 4층 제일 끝에 있는 휴게실에서 한송이를 만났다. 의자에 앉아 잡지를 한 권 펼쳐서 읽고 있는데 한송이가 지나가다가 알아보고 다가온 것이다. 간호사복이 좀 촌스럽다.
의준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한송이의 표정이 어색하다. 미소를 짓기는 하는데 좀 멋쩍어하는 느낌.
“잘 지내셨어요?”
“…….”
의준은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 했으나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기만 했다.
“언니가 연락하셨나 봐요?”
“…….”
갑자기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약간 움찔한 의준.
“저 괜찮아요.”
“…….”
그런데 의준은 딴짓 하다가 들킨 것처럼 왜 이렇게 멍청히 엉거주춤 서 있기만 하는 거지……?
“점심 드셨어요?”
사실 점심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어젯밤 새벽까지 아무런 소득 없이 고시원 근방을 쏘다니다가 들어와서 정신없이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송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런 뒤 빵 반 조각만 뱃속으로 쑤셔넣은 다음 곧바로 병원으로 온 것이다.
그런데도 의준은 점심을 먹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한송이는 약간 민망해하며 말을 잇는다.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오늘 일이 많아서…….”
아,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의준은 말 대신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딘지 해쓱해 보이는 한송이의 얼굴. 의준은 그녀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송이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걸어간다. 그때 마침 수간호사가 저만치에서 나타나 한송이를 불렀다. 수간호사는 의준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의준은 슬며시 몸을 돌려서 복도를 통해 로비 쪽으로 갔다. 복도 양쪽은 입원실이다. 환자들 몇몇이 지나간다. 발을 질질 끌기도 하고, 링거 스탠드를 밀기도 하면서. 병실 문은 대부분 닫혀 있었는데 중간의 하나만 반쯤 열려 있었다. 의준은 그곳을 지나가다가 문득 멈춰섰다.
병실 안쪽에서 어떤 사람이 환자복을 입고 서서 간호사와 말을 하고 있는 모습이 얼핏 보였기 때문이다.
이게 뭐지……?
무엇인가가 어색했다.
의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
의준은 본능적으로 얼른 문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 순간 생각이 났다.
할아버지.
그리고 너무 작은 키.
병실 안의 그 환자. 얼핏 보기만 했을 뿐이라서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노인이며 키가 아주 작은 것만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의준은 병실 문을 보았다. 환자 이름이 셋 붙어 있었다. 두 사람은 종이에 인쇄된 이름. 나머지 한 사람은 사인펜으로 쓴 이름. 오늘 임시로 써놓은 것 같았다.
문태식
의준은 얼른 돌아서서 복도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계단통으로 들어가 한 층 내려갔다. 그 다음 다시 문을 열고 병원 내부로 들어갔다.
3
의준은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심 여사와 말을 주고받은 키 작은 노인의 이름이 문태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바로 한송이의 차에 부딪친 사람이리라.
의준이 그 병원에 입원하려고 자전거에 올라탔던 때가 떠올랐다. 의도적으로.
그리고 문태식 역시 그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한송이의 차에 부딪히는 장면을 생각해 보았다. 역시 의도적으로.
그렇다면 문태식은 왜 한송이를 노렸을까?
너무 빤히 보이지 않는가, 그 이유가. 문태식은 한송이와 의준의 관계를 아는 것이다. 문태식의 최종목적은 의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았을까?
심 여사가 의준의 아파트까지 뒤쫓아왔었다. 그 다음에는 문태식이 등장했겠지. 의준의 뒤를 미행하며 누구를 만나는지 무엇을 하는지 모두 알아냈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송이가 의준의 아파트에서 자고 간 것까지 확인했겠지. 그런 뒤 한송이에게 접근한 것이리라. 그러는 동안 의준은 넋을 놓고 지냈다. 혹 의준이 변장한답시고 요란을 떨고서 고시원 주변을 헤매고 다닌 것도 저들은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젯밤의 일까지.
그리고 오늘 아침 한송이에게 접근해서 차에 부딪혔다.
이유는?
저들은 이제 무슨 일인가를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준비를 다 끝내놓고서.
그리고 그 첫 목표는 바로 한송이.
한송이가 의준의 아파트에서 자고 간 것을 확인하고서 저들은 나름대로 확신했을 것이다. 의준과 한송이의 관계를.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지금 무슨 일인가를 벌이려 공작을 꾸미고 있는 것이리라.
그동안 의준이 명송이와 한송이 사이에서 꽃놀이에 취해 있는 사이에 저들은 멋지게 일을 계획하고 조사하고 가늠하고 실행해 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그 노인이 ‘병원 근처에 사는 할아버지’로 표현된 것을 보니 벌써 이 근처로 이사까지 해놓고서 완벽하게 무대를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 첫 삽을 뜬 것이다. 멋지게. 감쪽같이.
사실 저들의 최종 목표는 의준이다.
그리고 그 목적에 다가가기 위해서 소모품으로 이용하려는 대상.
한송이가 위험해!
그리고 어쩌면 더 나아가서 명송이와 떠버리까지도 대상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4
의준은 스스로를 몹시 나무랐다.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쓸데없는 사치에 빠졌었다. 즉, 감상에 젖었던 것이다.
인생의 감상. 펜트하우스 리모델링, 옥으로 만든 조각품, 무도회, 한옥의 꿈, 그리고 두 송이에 대한 혼자만의 상상, 심지어 아리아에 빠지기도 하고.
자신에게는 그러한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준은 한동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 있는 그 시신을 잊었는가? 자신의 손으로 취한 생명들의 끝모를 한을 지금껏 외면해 왔단 말인가? 자신 대신 생명을 잃은 검사와 판사 부부. 그들의 꽃 같은 삶, 그리고 미래, 그들의 파괴된 영광의 길을 모두 잊었단 말인가?
허락되지 않은 사치에 취해 있었던 잠시의 시간들. 좋게 말하면 지금까지 그것들을 모두 누렸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지만 의준은 곱게 물러나진 않을 것이다. 마지막 진땀 한 방울까지 다 짜서 맞설 것이다.
해보자!
끝까지.
의준은 벽 공간에서 라이플을 꺼냈다.
5
의준은 집에 보관되어 있는 술 중 가장 비싼 것을 가져왔다. 그리고 잔을 두 개 준비했다.
그 다음 펜트하우스 창 앞에 탁자를 갖다놓고 잔 둘을 올려놓은 다음 술을 가득 따랐다.
잔 하나는 의준을 위한 것.
또 하나는……?
맞다. 그 하나도 역시 의준을 위한 것이다. 죽은 의준.
살아 있는 의준과 죽어 있는 의준. 그 둘에게 모두 조의를 표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살아 있는 의준에게 잔을 들라 해야겠다.
勸君更盡一杯酒(권군갱진일배주)
그대여 다시 한 번 술잔 드시오
그대가 먼 길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하니 잔을 한 번 더 들라는 것이다. 그 길은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이다. 그것을 알기에 다시 한 번 잔을 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왕유(王維)는 안서(安西) 땅 위성(渭城)에서 친구 원이(元二)를 만나 송별사를 지었다. 위성은 그보다 더 먼 서쪽 변방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전송하는 일종의 이별의 장소였다. 친구 원이는 나라 끝에 있는 변경의 도시 양관(陽關)으로 부임해서 가는 것으로서, 그곳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다.
이 시의 원제목은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 즉 ‘사신으로 떠나는 원이를 안서에서 보내며’이지만 위성에서 이별한다 하여 흔히 위성곡(渭城曲)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시에서 왕유는 이제 가면 언제 올지 모르는 친구에게 한 잔 더 하고 떠나라고 권하며 자신의 애틋한 마음을 전한다. 따라서 의준은 이 시의 제목을 ‘위성별곡’이라 정했다.
의준은 잔 둘을 차례로 들어 하나씩 단숨에 마셨다. 평소 마시지 못하는 술을.
***
위성별곡(渭城曲) | 왕유(王維, 692~761)
渭城朝雨浥輕塵(위성조우읍경진)
| 위성의 아침봄비 흙먼지 적시고
客舍靑靑柳色新(객사청청유색신)
| 객사마당 버드나무 너무 푸르니
勸君更盡一杯酒(권군갱진일배주)
| 그대여, 다시 한 번 술잔 드시오
西出陽關無故人(서출양관무고인)
| 변방으로 떠나시면 그대 그리리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