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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가 아닌 사용자의 입장에서 본 UX

배달의 민족, 스튜디오메이트, 랭디

by 이성긍

01. 회의실에선 잘 안 보이는 그것, UX


어떤 문제를 어떻게 풀 건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회의실의 온도가 높아집니다. 여러 솔루션을 두고 고민하다가 "이 변화가 전체 사용자 경험에는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자문해보고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느끼면 마음 깊이 부끄럽습니다. 벽에 "고객 집착"이라고 써있는 회의실에서 이 부끄러움을 느끼곤 올해 공부의 키워드를 UX로 잡아봐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설 연휴 때도 UX와 관련된 아티클도 읽어보고 영상도 보며 이리저리 깔짝대보았는데요. 의미있는 시간이었지만- 공부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니 깨달음이 깊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요해보이는 것들을 조금씩 메모해두기만 했습니다.


의외의 발견은, 평소 쓰는 앱들을 한번 더 돌아보는 데에 있었습니다.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학습하고 자연스레 쓰고 있는 사용자의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전에 누워서 앱을 쓰다가 든 생각들을 휘발되기 전에 적어둔 것 뿐이라 단편적인 감상에 가까울 수 있으나, 큰 의도 없이 보았을 때 느낀 점들이 사용자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믿고 기록해봅니다.


배달의 민족, 스튜디오메이트, 랭디 에 관한 메모를 남겼습니다. 3개 앱 모두 평소에 자주 사용하는 제품입니다.



02. 사용자의 과제와 무관한 경험


설 연휴를 맞이해 방어 한 접시를 주문했습니다. 늦어도 되니 눈길 조심해서 오시라는 메시지를 덧붙이고, 혹 눈길에 배달 주문이 거부되지는 않을까 싶어- 평소 같으면 주문 직후 이탈했을 화면을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조리가 시작되었는지 도착 예정 시간이 떴는데, "너의 bhc는 뭐야? 나만의 bhc 정하기" 라는 중앙 하단 플로팅 메시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중앙 하단의 위치, 둥둥 뜨는 모션, 다채로운 색의 조합으로 미루어보건대 의도된 가시성으로 보였습니다.



방어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나에게 치킨이라.. '나와 관계 없는 광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령 광고에 설득되었다 한들 방어를 취소하고 치킨을 주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UI 솔루션을 두고 논의할 때 '광고 같다'라는 피드백이 단순히 UI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 드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소라면 노이즈로 인식할 플로팅을 한번 클릭해보았습니다. 하단으로 쭉 스크롤 되어 광고 영상이 재생되었습니다. 도착예정시간이 뜨는 화면 아래로 스크롤하면 광고 영상 영역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주문 완료 페이지.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이 많았을 지면이었을 것 같습니다. 사용자가 '주문'이라는 가장 중요한 과제를 이미 마쳤기 때문에 이탈 비용 (사용자가 이탈했을 때 플랫폼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 또는 감수해야 하는 손해 를 의미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이 비교적 낮으면서, 배달 현황을 확인하기 위한 체류와 재방문이 발생하는 지면이니까요. 예상컨대 사용자의 체류를 수익화하기 위한 실험이 이뤄졌을 지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달의 민족에서 웹툰 플랫폼인 '만화경'을 왜 서비스하는지도 궁금했는데- 이렇게 주문 완료 ~ 음식 수령 까지 대기하는 시간을 플랫폼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배경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곱씹으며 생각하다가- 저의 지난 경험들이 떠올랐습니다. 비즈니스 요구사항을 제품에 녹이는 것이 아니라 제품의 빈 곳을 찾아 구겨넣는 것에 가까운 결정을 직접 하기도 했고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어색한 결정이 부자연스러운 제품 경험을 만들고 결국 비즈니스 기여치도 애매해- 나중에는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조차 '어? 여기 이런 게 있었네' 하는 레거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즐겁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생각이 복잡해져 이도저도 아닌 결정을 내릴 것 같을 때는- 사용자의 과제가 무엇이지? 만 생각해보기로 다짐했습니다. 사용자가 자신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반복될 때 비즈니스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생각하는 사이에 방어가 도착해서 냠냠, 맛있게 먹었습니다.




03. 사용자가 쓰지 않는 언어


퇴근 후 주 1회씩 춤 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수업을 예약하기 위해 스튜디오메이트 앱을 사용하는데요. 4월까지 남은 수업 횟수를 모두 소진해야 하는데 잔여 횟수가 꽤 되어서- '아니 내가 수업을 이렇게 안 들었나?' 싶어 수강권 이용 내역을 확인했습니다. (작년 하반기에 이직 준비니 병원이니 뭐니 하면서 생각보다 수업을 몇 번 못 가긴 했더라구요.)


기간 정렬 기준을 변경하는데 멈칫, 했습니다. 저에게는 익숙한 언어이지만 다시 읽어보니 친근한 언어는 아니었습니다. 개발 요청 문서 쓸 때 말고 내림차순, 오름차순 이라는 말을 자주 쓰나?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튜디오메이트 앱 사용자 특성을 고려했을 때도, 사용자가 쓰는 언어와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림차순 대신 최신순, 오름차순 대신 오래된순 이라고 쓰는 것이 사용자의 일상과 조금 더 닮아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 후기 정보를 제품에 어떻게 노출할 것인지 논의하면서 용어의 정확함과 익숙함 사이에서 고민했던 경험이 있는데요. 후기처럼 신뢰도가 중요한 정보에서는 명확하게 정의된 기준과 용어를 적시하는 것도 분명 필요하지만, 기본은 사용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쓰는 것일 터입니다. 얼마 전에 미용의료 라는 새로운 도메인에 뛰어든 만큼, 평소보다도 더 부지런히 사용자들의 표현과 문화를 궁금해하며 익숙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04. 다른 생김새, 다른 경험


매주 월요일, 목요일 출근 전 아침에 일본어 회화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수업을 예약하고 예/복습하기 위해 랭디 라는 제품을 사용합니다. 그 목적 외에는 랭디를 열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하릴 없이 습관처럼 열고 몇십분씩 체류하는 인스타그램, 유튜브랑은 다르지요. 그래서 첫 온보딩 때를 제외하고는 GNB에서도 홈, 수업예약 외에는 탐색해본 적이 없는데요.


우연히 평소보다 더 일찍 수업 창에 접속해 선생님을 기다리게 되었고 심심해서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커뮤니티'를 클릭했습니다. 뭔가 어색하다- 싶었는데, 아주 작은 차이를 발견했습니다. 커뮤니티만 헤더에 메뉴명이 기재되어 있고, 서브메뉴가 좌측 정렬로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사용자의 학습 비용을 낮추기 위해 익숙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고, 가급적 일관된 UI를 사용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한데요. 제품 내에서도 기능 목적이 크게 다르면 굳이 UI의 일관성을 고집할 이유가 없지만, 커뮤니티 가 그런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다른 구조를 가진 이유가 궁금하네요. 개발 조직이 분리되어 있거나 개발 언어가 다르다든지- 하는 구현 상의 이슈는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수업예약, MY 탭과 다르게 생긴 커뮤니티 탭


그런 경험은 저도 겪어보았는데요, UI 요소 하나 건드리려고 시작한 일에서 조직 간의 협업 구조 개선 또는 리팩토링의 필요성을 파악한다고 해도 당장 건드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장기적으로 필요한 일이지만 단기 과제의 시급성이 높다면 당장은 분기 개발을 택하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제품 개발의 확장성만큼 속도 역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결정들 자체를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런 부채가 하나씩 모여 이렇게 제품 곳곳에서 작은 누수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경각심이 들었습니다.






위에 언급한 제품들 모두 만드시는 분들의 노고와 고민이 가득 담긴 소중한 제품일 것입니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어라?' 싶었는데 막상 적다보니 만드시는 분들 입장이 이랬겠구나.. 싶은 부분들도 있었거든요. UX만 고려하기에는- 비즈니스 요구사항도 있고 구현 일정의 제약이 있기도 하니까요. 만드는 과정을 떠올리다보니 자연스럽게 또 공급자의 입장에 이입하는 제 자신을 돌아보며- 더 의식적으로 자주 PO의 시선에서 벗어나 사용자의 입장을 체험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내 제품을 대할 때 'PO인 나의 입장'에 관대해지는 걸 경계해야겠다는 다짐도요.


내 제품이 사용자의 문제 해결 여정의 자연스러운 습관이 될 수 있도록, 사용자가 어떤 경험을 아주 자연스럽게&의식하지 않고도 당연하게 수행할 수 있는지 능동적으로 공감하는 PO가 되고 싶습니다. 별 생각 없이 사용하던 제품들도 눈에 불을 켜고 한번 더 돌아보는 습관, 올해 조금씩 갖춰나가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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