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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딸

by 이영진

장군의 딸

이영진


늘씬한 키의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혼자 오셨어요?”, “예” 내가 좀 난감한 표정을 짓자, “왜요? 혼자는 안 되나요?”하고 물었다. “투어는 다섯 명 이상이라야 시작하거든요”, “멀리서 왔는데 좀 구경시켜 주세요” 떨떠름하게 명함을 교환했다. 명함에는 ‘나비아트센터 관장’이라 쓰여 있었다.

정년퇴직 전까지 나는 고양아람누리 공연장 무대기술감독으로 근무했었다. 공연장 건축 때부터 기술 총괄로 극장 조성에 깊이 관여하여, 귀빈들이나 시민들의 극장 투어는 모두 내가 도맡아 했다. 무대, 분장실, 무대 상, 하부, 조명실, 음향실 등等, 일반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곳을 보여주면, 신기해하며 즐거워했다. 극장 투어 프로그램에 대한 시민들의 호감도가 제일 좋았고, 내겐 큰 기쁨이었다.


어쨌거나 투어를 시작했다. 극장의 구조와 역사, 전용 극장과 다목적 극장의 특징에 대해 하나씩 설명했다. 1980년 이후 각 지역에서 정부 지원금으로 공연장을 우후죽순 짓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다목적 공연장. 다목적이라는 말은 두루 사용할 수는 있지만, 전용은 아니라는 뜻이다. 각 공연 특성에 맞춰 필요로 하는 잔향 시간(소리가 시작되어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이 있는데, 이걸 일률적으로 1.6초에 맞춰 놓은 곳이 다목적 공연장이다. 그래서 연극을 하면 긴 잔향 때문에 대사 전달이 정확히 되지 않는다. 소리가 왕왕 울려 알아듣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반대로, 음악회는 잔향 시간이 2초를 넘겨야 소리의 울림이 풍부해지는데, 1.6초는 소리의 여운을 없애버려 감동이 덜하게 된다. 따라서 이제 더는 다목적 공연장을 짓지 말고 공연 목적에 맞는 전용 극장을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왔다며 내 주장을 피력했다. 무대 기계, 조명, 전기음향과 건축음향 등等, 어려운 전문 용어와 공연 환경에 대한 설명에도 상당히 이해가 빨랐다. 가끔은 예리한 질문을 하여,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머리가 참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다.

코로나 여파로 공연은 중지되고, 직원들은 6시에 다 퇴근한 저녁 늦은 시간. 동갑내기 중년 남녀 단둘이서 극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려니 왠지 어색했다. 뭔가 분위기 반전이 필요하여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장군님은 건강하십니까?”라고. “예? 무슨 말씀이신지?” 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부친 건강은 어떠시냐고요. 이 지역이 아버님 사단장 시절 근무하시던 곳이잖아요.”, “아! 오래전 일인데 어떻게 아세요?” 감격한 모습이 눈에 어렸다. “저도 왕년에 장교였습니다.” 훨씬 더 투어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오페라 하우스, 음악당, 소극장까지, 세 개의 공연장을 다 보여드리고 모든 설명을 마쳤다. 싱그러운 웃음과 함께 고맙다며 정중하게 내게 인사를 했다. 나도 고개 숙여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이처럼 진심으로 공연장에 깊은 관심을 보여준 손님은 오랜만이어서 고마웠다. 괜찮다고는 하였지만, 굳이 주차장까지 안내했다. 잠깐 어딘가로 통화하더니, 작은 포르셰 스포츠카를 타고 떠났다. 모든 걸 가진 그녀가 부러웠다. 수많은 극장 방문객 중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는 사람이다.

몇 년 전 파주시 공무원이 SNS에 올린 글에서 그녀에 대해 언급한 글을 보았다. 파주坡州 검단사黔丹寺에서 행해진 노태우 전 대통령 안장식安葬式에서 고인의 자녀들이 보인 겸손한 됨됨이에 감동했다는 글이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겠구나’, 역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다를 수 없을 것이다. 인격과 품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까.


그런 그녀가 요즘 매스컴에 자주 등장한다. ‘세기의 이혼’이라나 뭐라나. 어마어마한 위자료, 대법원까지 가는 이혼 소송. ‘무엇 하나 부러운 게 없을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구나’ 생각했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불행이 한꺼번에 찾아오다니. 뉴스에서 굳은 표정의 그녀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요즘 배우는 노래다. ‘리아 킴’의 <위대한 약속>


좋은 집에서 말다툼보다 작은 집에 행복 느끼며좋은 옷 입고 불편한 것보다 소박함에 살고 싶습니다(중략)위급한 순간에 내 편이 있다는 건 내겐 마음에 위안이고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벼랑 끝에 서보면 알아요(후략)


노래 한 구절 한 구절이 절절한 교훈이다. 늘 무지개를 좇는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알려주는 좋은 노래다. 가족의 사랑만큼 소중하고 큰 행복이 어디 있을까?

수없이 험난한 삶을 살았던 추사의 가르침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랜 제주도 유배를 마친 70 노년의 김정희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모임은 두부찌개 보글보글 끓여놓고 아들, 손자, 며느리 다 함께 둘러앉는 것’, 가족과 함께 지내는 평범한 일상이 진정한 행복이라 하였다.

환갑 지나 노년의 행복을 찾아야 할 그녀에게 닥친 시련.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는 느낌일 것이다. 그러나 삶이란 늘 산이 있으면 골이 있는 게 아닐까. 장군의 딸, 대통령의 영애, 재벌가 며느리, 부자 남편과 올바르게 성장한 자식들. 누릴 것은 모두 누렸던 그녀에게 지금 상황이 큰 아픔이겠지만. 슬기롭게 헤쳐 나가길 바란다. 누구의 부인, 누구의 어머니로만 그치지 말고 더 큰 일을 했으면 좋겠다. ‘마더 데레사’나 ‘오드리 헵번’처럼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편에 선다든가. 아니면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 초록별에 평화가 올 수 있도록 개인의 행복만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행복을 위해 앞장서 주길 기대한다.


우연한 인연으로 만나 한 시간 반을 함께 했던 장군의 딸. 그녀에게도, 그 가정에도 예전처럼 평화와 사랑이 다시 돌아오길 빈다.


2024년 계간문예 겨울호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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