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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Jun 13. 2020

간장계란밥에 대하여.


어릴 적부터 맞벌이셨던 부모님을 대신해, 우리 집엔 친할머니가 자주 와 계셨다. 할머니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나와 동생의 방과 후 식사 및 간식을 챙겨주시는 것.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에 맞춰 김치볶음밥, 짜파게티, 카레 등 이것저것을 뚝딱 만들어주시곤 했다. 동생이 중학생이 될 무렵까지 거진 10년 넘게 우리의 끼니를 책임져주신 거다. 그렇게 얻어먹은 할머니의 음식들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음식이 하나 있다.


고슬고슬 갓 지은 하얀 쌀밥에 쪼로록- 간장과 참기름을 붓고, 그 위에 반숙 프라이를 탁 얹어주면 끝. 여기에 버터까지 넣으면 고소하면서도 이국적인 풍미가 더해지는데, 시원 쌉쌀한 총각김치와 함께 먹으면 그렇게 별미였다. 세상 간편한 레시피로 만든 음식 치고는 꽤 깊이 있었던 할머니의 음식, 간장계란밥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 엄마는 할머니가 간장계란밥을 해주셨다고 하면 썩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바쁜 와중에 곰국이며 갈비며 맛있는 반찬을 잔뜩 해놓고 갔는데, 굳이 별 영양가 없는 음식을 해 먹였다고 생각하셨을 터다. 하지만 대부분의 간장계란밥은 나와 남동생이 졸라서 얻어낸 것이었지, 할머니가 귀찮다고 대충 챙겨준 음식이 아니었다. 엄마한테 혼날까 봐 속으로만 생각했지만.


할머니는 점점 우리 집에 오지 않으셨다. 나와 남동생은 더 이상 할머니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가 아니었고, 할머니 역시 우릴 챙길 여력이 더는 없으셨다. 그렇게 나는 격동의 사춘기를 지나 대학생을 넘어 워라밸이 전혀 불가능한 직장인이 되었다. 내 삶의 9할을 일에 바치며 살고 있을 때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혼자 남으신 할머니는 어쩐지 자주 다치셨다. 병원에도 갔다가, 요양원에도 갔다가, 돌고 돌아 할머니가 정착한 곳은 다시 우리 집이었다.


함께 살게 된 할머니는 늘 방 한 켠에 누워 TV만 보셨다. 방에서는 언제부턴가 할머니 냄새가 났고, 엄마는 나름대로 쌓아뒀을 며느리로서의 설움을 조금씩 표출시켰다. 그렇게 엄마와 아빠는 자주 다퉜고, 나는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할머니는 그저 누워계셨다. 간장계란밥은 커녕 혼자서는 뭘 해 드실 수 없던 할머니는 어느 날엔 전기 커피포트를 그대로 가스레인지에 올렸다가 집을 홀라당 태워드실 뻔하기도 했다. 그렇게 1년 남짓을 있는 듯 없는 듯 함께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샘을 하고 집에 돌아와 못다 잔 잠을 자는데,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세면도구 챙겨서 병원으로 와. 할머니 돌아가셨어."

눈곱을 떼고 짐을 챙겨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맞다, 오전에 할머니가 무릎 수술을 받기로 하셨었지. 할머니는 그 수술을 받다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 가보니 엄마는 병원 측에 어떻게 된 일인지 따지는 중이었고, 고모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우셨고, 나를 비롯한 손주들은 손님을 맞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3일째 되던 날, 온 가족이 영안실로 들어가 차갑게 누워계신 할머니를 마주했다. 돌아가면서 어색하게 손을 잡아드리고 나오자마자 할머니는 새하얀 가루가 되셨다. 문득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게 잔인하게 느껴지면서도, 허망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 옆에 할머니를 모셔드리기 위해서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길. 한겨울 새벽은 너무 추웠고, 딱딱한 바닥에 누워 잤더니 잠이 오기도 했고, 피곤했다. 그렇게 "춥다"를 연신 내뱉으며 산소에 올랐다. 수백 개의 묘 사이에서 할머니의 자리를 겨우 찾아, 할머니를 내려놓고 삽으로 흙을 퍼 덮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냥 운 정도가 아니라 애처럼 목 놓아 울어버렸다. 가족들이 당황한 것 같았지만 멈추질 않았다.


지금도 그때의 감정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눈물이 차오른다. 그렇다고 내가 할머니와 남다른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살가운 손녀도 아니었는데 왜 일까 생각했다. 그러다 할머니가 챙겨주셨던 수많은 끼니들이 떠올랐다. 잊고 있었던 아주 오래 전의 기억들이었다.


아니다, 최근의 기억도 있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쉬는 날 할머니를 모시고 코앞에 열린 장에 간 적이 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천천히 한 바퀴를 돌다가, 기어이 먹을 걸 사주시겠다고 해서 산 강냉이 한 봉지. 그날 나는 강냉이를 먹으면서 할머니를 위해 시간을 쏟은 나에게 말도 안 되는 뿌듯함 같은 걸 느꼈었다. 바쁜 와중에도 할머니를 챙기는 다정한 손녀 역할을 했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손녀를 챙긴 건 할머니셨다. 손녀 입에 뭐라도 먹이려고 꼬깃한 지폐를 꺼내 강냉이 한 봉지를 손에 쥐어주시고는 그마저도 더 챙겨주지 못해 아쉬워하셨다.


이제는 맛도 냄새도, 뭐 하나 기억나지 않는 할머니의 음식이지만, 그때의 그 마음만은 기억해둬야겠다. 이렇게 두서없는 몇 글자의 글을 남겨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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