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그 냉장고 때문에 연관 검색어로 살인이 뜨는 배우가 될순 없었다.
공대를 다니던 김동식은 11월에 입대하여 2월에 혹한기를 겪었다. 제대가 코앞인데 혹한기에 넣는 미친놈이 어디 있냐는 병장의 투덜거림이 모깃소리처럼 윙하고 지나가니 여름이 오고 이윽고 두 번째 혹한기 속에 있었다. 어느덧 병장이 된 동식은 제대 후 취업 준비를 떠올렸다. 솔직히 그건 아주 잠시였고 대부분은 입대 후 헤어진 여자 친구 생각이었다. 여자 친구가 연극을 좋아해서 대학로 데이트를 하던 시간이, 텐트의 얇은 바닥재로는 막지 못한 돌멩이들처럼 자려도 뒤척이는 몸을 쑤셔왔다. 전 여자 친구 얘기를 하면 아들 군번인 놈이 ‘상병님이 키가 크고 잘생겨서 배우 해도 되실 것 같습니다’ 하며 듣기 좋은 소리를 했고, 제대하면 각자 여자 친구를 만들어서 더블데이트하자며 웃었다.
MBTI를 검사하면 I로 나오는 동식은, 일 년 반 사귄 여자 친구의 영향인지 혹은 어느덧 취업 준비를 앞둔 시기라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라는 생각 때문인지 대뜸 연극 오디션을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당시엔 어른의 시작점처럼 보였던─ 서른이 되기 전까지 도전해 보자며 뛰어들어 스물아홉이 된 지금, 무대에 한두 작품을 올려본 신인배우가 되어 있었다.
"하아. 언제 다 치우지?"
오전 8시 알람이 울리고 어기적어기적 거실로 나온 동식은 어제 친구들이 왔다가 간 흔적을 쳐다보았다. 술병과 안주로 먹은 음식들이 테이블을 차지했고, 그 옆에는 방구석에 뒀던 기타도 나와 있었다.
“알바부터 갔다 와서 치우자.”
술판의 흔적을 지나쳐 숙취를 달랠 만한 것을 찾아 냉장고를 열었지만, 자취생의 냉장고는 빈약했다. 문을 닫으려던 순간, 낯선 일회용 통이 눈에 띄었고 그 안에는 네모반듯하게 잘린 수박이 들어있었다. 수박이 들어있던 통과 함께 여자 모양의 레고블록 하나가 냉장고 안에 놓여 있었다. 여자 블록은 갈색 단발머리의 빨간 옷을 입은 모습이었는데, 수박도 블록도 냉장고에 넣은 기억이 없었다.
"어제 누가 취해서 누가 넣어놨나?"
식탁에 수박을 든 통을 내려놓고 젓가락으로 찔러서 하나둘씩 집어먹었다. 수박의 넥타가 입을 채워 텁텁했던 몸이 풀리고 술로 인해 끊긴 필름을 더듬더듬 이어볼 여유가 생겼다.
"아. 어제! 민후인가?"
어제 친구들과 2차로 동식의 집으로 가는 길에 중학교 동창 친구 서민후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연기 전공도 아닌 내가 뭐든 해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게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이 모든 노력이 나중에 결과가 없다면 버려야 하는 시간이잖아. 이제 서른까지 반년 남았는데, 그 안에 자리 잡겠냐.”
술로 비뚤어진 동식의 혀가 배우로 자리를 못 잡는 불안한 마음을 술술 뱉어버렸다. 종종 무대에 오르고 있지만, 배우로서는 갑자기 사라져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을 위치였다.
“사실은 열심히 사는 척하면서 직시해야 하는 현실을 피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아니, 사실 그렇긴 하지.”
이런 불안정한 시간이 오래될수록 동식은 지쳐갔다. 그래서 멀리 보지 않으려 했다. 그저 앞날만 생각하며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며 지냈다. 그게 오래 버티는 방법이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젠 그 방법조차 옳은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몸도 마음도 무거워 보이는 친구의 고민과 푸념을 듣던 서민후는 손에 들고 있던 수박바 아이스크림 봉지를 뜯었다.
“그럴 땐 눈감고 입을 크게 벌려봐.”
“어? 이렇게…?”
동식은 서민후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입을 연 채로 ‘이러면 뭐가 좋은데?’라는 말을 했더니 ‘이하며 어가 조으데'처럼 들렸다.
“앗, 차가! 뭐야?”
동식의 입안으로 불쑥 들어온 차가운 감각에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아이스크림이 들어와 있었다. 아이스크림의 막대 부분을 잡고 서민후를 쳐다봤다. 자신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군 게 웃긴 건지, 인상 쓰는 동식이 웃긴 건지 서민후는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야. 똥식아. 너처럼 성실한 놈은 내 주변에 없어. 인성도 좋지, 잘생겼지, 노력하지, 내가 보기엔 넌 잘 풀릴 앞날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내가 배우나 연기 쪽은 모르지만, 어디에서나 너 같은 사람들이 잘 되더라.”
동식의 무거운 마음에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응원의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고른 말이었다. 만나면 서로 놀리고 장난치기 일쑤였는데 나름 진지하게 말을 꺼내니 서민후는 어색한 듯 딴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맙다.”
동식은 고개 돌린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민후는 멋쩍었는지 휘파람을 불었다. 민후의 휘파람 실력은 엉망이라서 무슨 노래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못 불렀고 그 소리에 또 같이 웃었다. 그렇게 2차로 동식의 집에 다른 친구들도 함께 들어왔다. 냉장고를 보더니 과일 하나 없냐던 민후의 혼잣말도 들었던 것 같다. 동식이 자는 사이에 수박을 사서 냉장고에 넣어둔 것일까. 동식은 카톡을 하나 보내고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카페로 출근할 준비를 했다.
[민후야. 어제 챙겨줘서 고맙다.]
카페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 집에 도착한 동식은 연기 공부를 위해 피시방에서 프린트해 온 드라마 대본과 시나리오들을 읽어보았다. 눈으로는 대본을 읽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따로 굴러가고 있었다.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배우로만 지내다가 더 나이가 들면 어떡하지. 딱 30대 중반까지만 노력해 보고 안 되면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하나?'
불안한 마음을 음식으로 채우려는 듯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냉장고 안에 수박이 보이자, 공식은 잠시 멈춰 섰다. 빈약한 자신의 냉장고를 보고 수박을 주문한 친구의 마음이 동식의 불안함을 감싸주는 듯했다.
“그래. 주변 사람들에게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자. 지금은 관둘 타이밍이 아니야.”
응원을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앞으로 며칠을 더 힘낼 수 있게 동식을 밀어주었다. 지금까지는 대학로 오디션을 주로 봤지만, 드라마 오디션부터 숏드라마까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동식은 자신이 도전할 수 있는 무대를 넓혀서 찾아다녔다.
오늘은 오전에 오디션이 있는 날이다. 새벽에 일어나 여느 때와 같이 냉장고를 열어보니 동식은 본 적 없던 애호박볶음이 있었다.
"엄마가 왔다 갔나…?"
집에서 밥을 잘 안 해 먹는 터라 냉장고 문 여는 것도 며칠에 한 번이 되기 일쑤였다. 촉박한 시간에 쫓겨 식사 대신 곡물 우유 한잔을 마시고 오디션장으로 나섰다. 오디션장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 중 연극영화과 동기들로 보이는 대학생들이 서로 모여있는 모습도 보였다. 동식도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을까. 부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자신이 할 일만 잘하고 오자는 마음으로 다독였다. 순서가 다가오고 준비한 것을 선보인 뒤 오디션장을 나오는 길에 전화가 걸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