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웅-우웅-]
“아들 바쁘나?”
“아니, 지금 괜찮은데 무슨 일 있어?”
“아빠가 요 며칠 병원 신세 좀 지겠다.”
“어? 아부지가 왜? 어디 아프시데?”
“폐병이라는데, 그래도 수술하고 회복하면 괜찮데. 너무 걱정하지 말고.”
“엄마는 괜찮고? 아부지 어느 병원에 있어?”
동식은 곧장 병원으로 가서 설명을 들었다. 아빠의 상태는 엄마의 말보다는 심각해서 최소 6개월 이상은 병원에 있어야 했다. 그동안 보호자가 있어야 하는데 엄마는 하던 일을 장기간 쉬긴 어려워서 회사에 다니지 않는 동식이 간병하기로 했다. 동식은 일주일 내내 자신이 병원에 있겠다고 했지만, 엄마는 그러면 동식이 다른 일을 전혀 못 하게 되기 때문에 반대하였다. 그래서 일주일 중 이틀은 병원에 있고 나머지는 간병인을 고용하기로 했다. 문제는 간병비였다. 하루 간병비가 16만 원에 현금 지급이고 보험도 당연히 안 되기 때문에 만만치 않은 금액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아들은 신경 쓰지 않게 하려는 부모님의 마음이 느껴졌다.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는 동식은 부모님의 뜻대로 자세한 건 모르는척할 수밖에 없는 자기 모습이 속상했다.
‘모아둔 돈도 없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다고 해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만 받고 있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전보다 더 바쁘게 시간을 쪼개서 사는 것뿐이었다. 자연스레 친구들을 만날 시간도 많이 줄어들었다. 가끔 동식도 모르게 냉장고에 채워지는 반찬, 채소, 과일들이 있었는데 엄마가 왔다 갔거나 집이 비는 날 친구들이 아지트처럼 쓰고 채워놓고 갔을 것이다. 그들의 흔적으로 하루하루 힘을 내서 한 걸음씩 내딛어갔다.
그러한 노력의 대가는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주연배우는 이미 뽑히고 조연배우 오디션을 보러 간 연극 ‘털모자 남자’가 첫 시발점이 되었다. 주연 배우의 갑작스러운 하차 소식에 연출가가 동식을 주연으로 불러드린 것이다. 틈나는 대로 대본과 시나리오를 보며 연습하던 노력이 쌓여서 연출가의 눈에 띄었다. 동식을 포함한 주연배우들이 연극을 홍보하기 위해 유명 유튜브 출연했는데 조회수가 터지며 동식의 존재감이 두드러졌고, 연극도 성황리에 진행되어 마지막 공연 날이 되었다.
“저번에 나간 유튜브 그거 유명한 건가?”
주인공의 할아버지 역을 맡은 김고두가 동료 배우들이 모여있는 공연장 분장실에 들어오자 다들 반갑게 인사를 했다.
“동식이랑 유미랑 정민이가 같이 나갔던 유튜브, 구독자가 600만 명이 넘어요. 엄청 유명해요.”
“어이구 그랬구나. 테레비 광고보다 효과가 더 있네. 손녀딸이 친구들이랑 대기실 구경 시켜달라는데 곧 공연 시간이라서 겨우 떼놓고 왔어. 껄껄.”
공연 끝나고 손녀와 함께 사진 찍자는 이야기를 하며 화기애애한 이야기가 오갈 때 연출가가 분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만원이요~~!”
복도에서 뛰어온 연출가가 만 원짜리를 한 손에 가득 잡고 부채처럼 흔들었다. 모든 배우가 눈이 켜져서 입이 귀에 걸린 듯 웃고 있는 연출가를 쳐다보았다.
“어? 오늘 설마…!”
“우리 막공 만석이에요?”
“털모자 남자! 막공! 빈 좌석 제로!!”
용수철처럼 방방 뛰며 좋아하는 연출가의 목소리가 대기실을 채우자,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자, 다들 하나씩 받아! 대표님이 주시는 만원이야.”
공연을 이끄는 권 대표는 공연 표가 남김없이 팔리면 만석 기념으로 만 원짜리를 챙겨주고 있었다. 작지만 기분 좋은 보너스였다. 은행에서 막 가져온 듯 빳빳한 만 원짜리는 돈 냄새를 풍기며 여기저기 나눠지고 있었다.
“와….”
동식은 손에 든 만 원짜리 한 장이 구겨지지 않도록 소중히 잡고 노년 배우 김고두의 곁으로 다가갔다.
“선생님, 여기에 사인해 주시면 안 될까요?”
김고두는 가볍게 웃으며 동식이 건넨 네임펜을 잡아 들었다.
“함께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열심히 해서 더 오래 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동안은 대선배를 보고 호들갑스러웠던 마음을 감추고 극에 집중하려 했었지만, 오늘만큼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내보이고 싶었다. 김고두는 사랑 고백이라도 하는 듯이 꽤 진지한 표정으로 우뚝 서 있는 키 큰 청년을 보니 자기 신인 시절이 생각이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뭘 그리 비행기를 태우나. 사인하는 게 뭐 어렵다고.”
[ 40년 뒤에는 할아버지 역할을 해요. ]
사인과 함께 짧은 메시지도 함께 남겼다. 지금은 자신의 손주 역할을 하는 동식이 할아버지 역할을 할 때까지 배우 일을 오래 하길 바란다는 응원의 마음이 담았다.
“내 것만 남기면 허전하니깐 다들 하나씩 적어볼까.”
김고두의 손짓에 모두 모여들었다. 연극 털모자 남자의 마지막 공연을 함께한 배우들의 사인이 만 원짜리를 빼곡히 채웠다.
“감사합니다! 액자에 끼워서 보관하겠습니다.”
연습 기간까지 합치면 반년 이상을 함께한 동료들의 애정이 담긴 메시지와 선배들의 응원 글이 동식의 손가락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것같이 느껴졌다. 배우 일을 계속 해도 될지 현실적으로 월급을 받는 일을 알아봐야 하는지 고민하던 동식은 한 번만 더, 하루만 더, 일 년만 더 해보자며 조용히 마음을 다잡았다.
“저도 해주세요~”
다른 배우들도 한둘씩 펜을 들고 대기실을 돌더니 어느새 만원 롤링 페이퍼가 시작되었다. 곧이어 공연 시간이 다가왔고 주연배우인 동식의 화이팅 구호를 시작으로 모두 역할 속 인물로 돌아갔고 이윽고 만석 관객의 우렁찬 박수가 커튼콜의 막을 내렸다.
“한성우와도 마지막이네.”
동식은 의상을 벗으며 그동안 맡았던 역할 한성우와도 작별 인사를 했다. 회식 장소로 가기 위해 일상복으로 갈아입는 중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김동식 배우님 번호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어디 신가요?”
“저는 A 브랜드의 마케팅팀 박도훈 대리입니다. CF 광고를 제안하고자 연락드렸습니다.”
“예? A 브랜드 광고요? 제가 알고 있는 그 영양제 회사 맞나요?”
건강식품으로 유명한 A 브랜드는 동식이 어릴 때부터 있던 회사였다. 명절 때가 되면 가족끼리 건강을 선물하라며 광고가 나오고, 요즘은 유튜브 광고를 통해 학생이나 스포츠 선수들을 모델로 세워 젊은 느낌의 콘셉트로 홍보하고 있었다.
“예. 맞습니다. 제안서를 메일로 보내드렸는데 못 보신 것 같아서 전화로 인사드립니다.”
핸드폰 너머로 매너 있는 회사원 특유의 영업용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배우님을 만나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언제 시간이 되실까요?"
동식은 간단한 질문임에도 입술에 주름이 사라진 듯 딱딱히 굳어버렸다. 그런 동식의 목소리에 안심하라는 듯이 부드러운 말투가 핸드폰을 넘어왔다.
“지금 알려주시기 어렵다면 스케줄 확인해 보시고 천천히 답장 주셔도 됩니다. 혹시 수요일까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 됩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회사에서 만나볼 수 있을까요. 회사 주소는 제안서 메일 안에도 있지만, 문자로 제 명함과 함께 한 번 더 남겨드리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확인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제안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화가 끊어지고, 이어서 명함 사진과 회사 주소가 적힌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와…. 뭐지? 내가 CF라니, 혹시 꿈인가?”
“어, 동식이 아직 안 갔어? 뒤풀이하는데 주연이 빠지면 안 되지~”
같이 무대에 섰던 박준호가 대기실로 들어왔다. 박준호는 의자에 털썩 앉아서 무대에서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자기 운동화로 갈아신었다.
“빠지긴요. 가야죠. 전화가 와서 받고 있었어요. 아, 준호 형! 마침, 잘됐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형 CF 찍어보셨죠?”
“응. 일반인 역할로 나오는 건 여러 번 해봤지. 왜?”
“저 방금 A 브랜드에서 CF 섭외 전화가 왔는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요? 시간 되는 날 있으면 수요일까지 알려달라고 하는데, 그 뒤엔 어떻게 되나 싶어서요.”
“이야. 축하한다! 오디션을 안 보고 바로 섭외하는 건 의외네. 크게 걱정할 건 없을 것 같은데, 가서 만나서 이야기 나눠보고 할지 말지 정하면 되지.”
걱정이 풀리지 않은 동식의 표정을 본 박준호는 뒤풀이 장소로 함께 이동하면서 자신이 광고 오디션 봤던 것부터 현장에서 어땠는지를 이야기해 주며 동식을 응원했다. 시끌벅적한 뒤풀이 끝에 귀가한 동식은 만취 상태가 되어서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다음날 몸을 누르는 숙취를 이겨내고자 척추를 들어봤지만, 곧 다시 침대로 고개를 떨궜다. 배를 푹신한 이불 위에 깔고 누운 채로 팔을 휘저어서 핸드폰을 잡았다. 서민후가 보내온 카톡을 열어봤더니 음성파일이 하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