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동식 [下]

완결

by 이월


재생 버튼을 누르자 술에 취한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친구야 수박 고맙따아! 나 챙겨주는 거 고마워! 내가! 갚을게! 금으로 만든 수박 들고 간다아악!]


[똥식아 녹음 했다~ 수박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금수박 넙죽 받습니다요~ 수박 넣어둔 사람 누군진 몰라도 완전 어부지리네]


놀릴 건수를 잡은 서민후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녹음되어 있었고 혀가 꼬인 상태의 동식이 연거푸 금수박 주겠다며 했던 말을 계속했다.


“헉 설마. 어제 취해서 여기저기 전화 돌린 건 아니겠지?”


급히 통화 목록을 찾아보던 동식은 통화 목록에 서민후만 적힌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겨우 발걸음을 움직여서 부엌으로 걸어 나왔다.


“술깨스틱이 있네? 아참, 어제 준호형이 뒤풀이 때 준 거지.”


동식은 핸드폰 잡고 뒤풀이 후 다들 집에 잘 들어갔는지 안부 인사와 숙취해소제 챙겨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술깨스틱의 녹색 포장지 절취선을 뜯어서 쪽쪽 빨아먹었다.


“이제야 직업이 생긴 것 같네.”


제법 긴 공연 기간 안정적으로 출퇴근을 하고, 주연배우가 되어 무대에 서는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연기를 계속 해도 된다는 확신이 들자 벅찬 마음이 들었고, 덕분인지 술이 조금 깬듯했다.


“아참. CF 제안서! 메일 확인해 봐야지.”


손에 든 핸드폰으로 바로 로그인해서 이메일을 열어보았다. 스팸메일과 각종 광고 이메일 사이에 있는 A 브랜드의 제안서 이메일을 열어서 읽어보았다. 제안서에 담긴 CF 내용은 젊은 세대를 타깃으로 한 청춘 콘셉트의 건강식품 CF였다.


“포카리스웨트 광고랑 비슷한 콘셉트네. 어라? 와! 나 메인모델이네!”


제안서에 적힌 ‘김동식 님에게'를 눈으로도 읽어보고 소리 내서도 읽어보고 자신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만져도 보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현실감이 와닿지 않았다.


“와아악! 이거 꿈은 아니겠지?”


공연 주인공을 시작으로 상상도 못 했던 광고까지, 동식이 '언젠가'라며 상상으로 그려본 자신의 미래 모습이 현실로 이뤄지고 있었다. 순조롭게 아니, 그보다 더한 속도로 좋은 일이 모이자 오히려 불안해지는 아이러니가 잠시 느껴졌다.


“병원비 낼 수 있겠다!”


부모님 생각이 난 동식은 눈이 번쩍 뜨였다. 기쁜 마음으로 스케줄이 비어 있는 날짜를 적어서 이메일을 보낸 후 확인차 담당자에게 전화도 걸어서 약속 날짜를 잡았다. 약속한 날에 A 브랜드 회사에 방문한 동식은 자리까지 안내하는 여회사원의 뒷모습에만 시선을 꽂았다. 커다란 회사 내부를 두리번거리면 견학 온 어린아이처럼 보일 것 같아서였다.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사무실을 지나가자, 직원들의 타자기 소리가 바쁘게 들려왔다. 직원은 커피와 함께 동식을 자리로 안내한 후에 미팅할 사람들을 부르러 가는 듯 구두 소리를 내며 사무실 안의 어딘가로 사라졌다.


‘우와. 이제 실감이 난다. 내가 A 브랜드 광고를 찍다니. 점점 긴장되네.’


회사로 오는 지하철 안에서도 자신이 광고를 찍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혹시 사기꾼들이고 본사에 가면 이런 미팅은 잡힌 게 없다며 입장 불가 판정을 받고 쫓겨나는 것이 아닐지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무덤덤해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는데, 미팅룸에 혼자 남으니 조금씩 긴장되기 시작했다. 23층에 있는 미팅룸은 통유리창을 통해 주변 풍경을 펼쳐내었다.


“안녕하세요. 김동식 배우님, 전화했던 박도훈입니다. 이쪽은 우리 마케팅팀 이고은 사원입니다.”


“안녕하세요. 이고은입니다. 털모자 남자 공연 보러 갔었는데, 가까이서 만나 뵈니 훨씬 잘생기셨네요.”


“공연 보러 오셨었군요. 감사합니다. 박도훈 대리님과는 연락만 주고받다가 직접 뵈니 반갑네요 하하.”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서로 인사를 나누고 두 사람이 주는 명함을 받았다. 회사까지 오는데 힘들지 않았는지, 공연 관련 영상 유튜브에 올라온 것을 봤다는 등의 긴장을 풀어줄 만한 근황 이야기가 오갔다. 덕분에 동식은 낯설고 어려웠던 마음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대화는 점점 광고에 관한 내용으로 흘러갔다. 박도훈 대리는 계약서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별일이라면…?”


“아. 그건 계약서의 이 부분에 적혀있습니다.”


동식은 계약서의 많은 글자 중 박도훈 대리가 손가락으로 집은 부분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법령 위반이나 사회상규에 반하는 행위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면 최대 출연료의 3배를 배상해야 한다….”


“별건 아닙니다. 마약이나 살인 같은 것에 연관되면 당연히 계약은 파기되며, 이미 CF가 공개되었을 때는 피해보상을 청구한다는 건데, 배우님은 걱정 없으실 것 같은데요? 하하.”


나머지 조항들도 읽어보니 계약서에 형식적으로 있는 조항 중 하나인듯싶었다.


“그렇네요. 저랑은 먼 나라 이야기네요.”


“그럼요. 우리 회사가 60년이 넘은 회사이다 보니 새로운 얼굴이 필요했는데, 만나 뵙고 이야기 나눌수록 저희가 딱 맞는 사람을 잘 찾은 것 같습니다. 하하.”


동식에게 지속적인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이 사회적인 예의일 테지만, 잘생겼다가 잘해주실 것 같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쑥스러운 듯 빙그레 웃어 보였다.


“저야 감사하죠.”


동식은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보았다. 괜히 시간을 뺏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했지만, 계약 실수를 하는 것보단 나았다. 하나씩 읽어보고 이해가 안 가거나 모르는 부분들은 물어봤다. 마지막 장까지 다 보자 안심하는 얼굴이 되었다.


“오늘 계약하시겠어요? 혹시 생각해 보실 게 있으시면 추후 다시 방문 주셔도 됩니다. 다음 주까지만 계약 확정 여부 알려주셔도 괜찮습니다.”


“두 분이 설명도 꼼꼼히 해주셨으니 다 이해되었습니다. 오늘 계약하고 가겠습니다.”


“계약 완료 전에 상부의 결재를 받아야 해서 다음 주 중으로 확정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취소되는 일은 거의 없으니 편하게 기다리셔도 됩니다. 하하.”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힘찬 악수를 하곤 기분 좋게 회사 건물을 빠져나왔다. 귀갓길 지하철 광고에 걸린 A 브랜드의 제품 사진이 보였다.


“저기에 내 얼굴이 자리 잡을 수도 있겠네.”“저기에 내 얼굴이 자리 잡을 수도 있겠네.”


히죽히죽 웃는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콧노래를 불렀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알려줘야지.”


통화버튼을 누르려던 손이 멈칫했다.


“아니지. 깜짝선물로 말없이 입금해 드려야겠다.”


동식의 새하얀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아이처럼 웃음이 삐쭉삐쭉 올라왔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계약 확정 연락과 함께 천만 원이 선입금으로 들어왔다. 동식은 곧바로 천만 원 전부를 엄마의 계좌로 입금했다. 입금 문자를 본 엄마는 놀라서 동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 돈 보냈어? 천만 원?”


“응 보냈어~”


“아니, 네가 천만 원이 어디서 생긴 거야. 보증금 뺀 거니?”


걱정스러운 엄마의 목소리와 달리 신남을 감추지 못하는 동식의 킥킥거림이 전화를 넘어갔다.


“엄마! 나 CF 찍어! 총 8천만 원 받는데 계약금으로 우선 천만원 받은 거야.”


당당한 아들이 목소리를 들리자 ‘아이구구….’하더니 말이 없어졌다. 웃으며 엄마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동식은 슬슬 걱정되었다.


“여보세요? 엄마, 왜 말이 없어.”


“아니, 놀라서 그러지. 우리 아들이 CF를 찍는 거야? 8천만 원을 받는다고?”


“응! A 브랜드 광고야 TV에도 나올 거래.”


울먹거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히끅히끅 들려왔다.


“엄마, 왜 울어. 지금은 일단 지금은 천만 원만 보내고, 나중에 더 보낼게. 이걸로 아빠 병원비랑 간병비 보태. 그동안 못 도와줘서 미안해.”


“아이구야. 미안할 거 하나도 없다. 어른들이 다 알아서 할 것을 네가 왜 신경을 쓰니. 동식아 네가 처음으로 큰돈 번 건데, 적금 들어서 장가갈 때 써라.”


“아잇! 내가 엄마 주려고 얼마나 기대했는데 그 돈 꼭 다 써버려! 안 그러면 나중에 내가 천만 배우 되어도 엄마 용돈 안준다아!”


행복한 옥신각신을 하던 두 사람의 승자는 동식이었다. 아들의 신나는 으름장을 이기지 못하여 천만 원은 엄마의 통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가지고 싶은 물건을 사지, 받은 돈을 전부 엄마한테 보내기는….’


그동안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는 아들의 말에 가슴이 시려왔다. 주변 또래들이 회사에 다니고 적금도 드는 일상을 보내도 비교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내심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 하나뿐인 자식이 하고 싶다는 것 하나 넉넉히 못 도와줬는데.’


통화가 끊긴 핸드폰 배경 화면에는 꽃다발을 한 손에 들고 팬들에게 사인해 주며 웃는 동식의 모습이 비쳤다. 어느덧 CF 촬영 날까지는 앞으로 일주일 정도 남아있었다. 큰 계약을 한 뒤에도 동식의 일상은 여전했다. 미뤘던 집 청소를 하고, 샤워를 한 뒤 아르바이트하러 나간다. 배우 수입이 안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투잡, 쓰리잡은 기본이었다. 오가는 길에 틈틈이 읽어 보며 공부할 대본이나 책들도 검정 에코백에 넣었다.


“CF가 들어왔던, 복권에 당첨이 되던 우선 하루하루 성실히!”


초심을 잃지 말자며 자신을 평소 일상에 가져다 두었다. 전과 다른 점이라면 불안한 마음이 가벼워졌다는 것이다. 직업 배우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감보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처음으로 더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