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친구였어요!"
유나는 다급히 떨리는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최근에 알게 된 친구인데, S대 다니는 친구라서 그런지 배울 점이 많았어요, 그래서 친하게 지내려고 하던 중이었죠. 제가 성호 오빠랑 연애하면서 고민을 이야기하자 미주가 헤어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얘기했는데 그걸 성호 오빠가 알게 돼서 미주랑 성호 오빠가 싸운 적이 있어요."
"유나야…!"
"아. 그렇군요. 옆집에서 나오신 건 왜죠? 옆집 분도 아는 사이인가요?"
동식을 향해 두 형사의 고개가 돌아갔다. 갑작스러운 시선에 말이 더듬거리며 입 밖으로 나왔다.
"아. 저는…. 그…. 모르는 분입니다. 방금 처음 봤어요."
"처음 봤는데 집에서 나온다?"
차분히 설명하고자 했지만, 갑작스러운 형사들의 질문과 냉장고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어 놓아서 말문이 막혔다. 어벙해진 입술을 뇌가 잡아당겼다. 형사의 눈빛에서 던져진 수갑을 피하고자 동식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평정심을 찾으려 했다.
"제가 동식 오빠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찾아갔을 거예요. 내 말이 맞지? 집에 동식 오빠 사진이 없어졌던데 오빠가 가져간 거지?"
"그렇긴한데.."
육성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유나는 곧바로 동식을 향해 말을 던졌다.
"곤란하게 해서 죄송해요. 동식 오빠는 어제 저를 처음 봤을 텐데, 사실 저는 팬이어서 동식 오빠가 배우인 거 전부터 알고 있었거든요. 우리 집에 동식 오빠 사진이 많은 것도 포토 카드 같은 거였어요. 연예인 좋아하는 팬들은 연예인 사진으로 포토 카드나 엽서를 만들어서 서로 나눠 갖곤 하거든요."
형사 중 한 명이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상황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깐 정리하자면, 김유나 씨와 육성호씨는 사귀는 사이고…."
"아니에요. 헤어졌어요."
유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형사의 말을 수정했다.
"네, 그럼. 서로 헤어진 전 연인 관계이며, 육성호씨는 피해자인 소미주씨와 다툼이 있습니다. 죽기 몇 시간 전에 함께 있는 모습이 CCTV에 찍혔고요. 옆집 분과 육성호 씨는 처음 보는 사이인가요? 302호 거주자 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김 동식입니다. 저는 이 남자를 오늘 아침에 처음 봤고 옆집 여자분은 어제 처음 알게 돼서 인사했습니다. 유나 씨 말대로 둘이 사귀는 사이냐면서 사진을 들고 와서 대뜸 화를 내길래 오해를 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302호 김동식 씨와는 초면이며 오해가 있었고, 301호 김유나 씨는 배우인 김동식 씨의 팬이었다. 맞습니까?"
동식과 김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형사님 말이 맞긴 한 데, 저는 미주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건 마치 제가 범인 같잖아요! 유나야 내가 미주를 죽일 정도로 원한이 있던 게 아니잖아! 넌 알잖아!"
자신을 둘러싼 시선에 당황한 육성호는 형사를 바라보며 억울해하다가 전 여자 친구를 향해 자신의 편이 되어 달라고 호소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김유나는 육성호의 눈을 피해 바닥을 바라봤다.
"내가 알던 성호 오빠는 화는 많지만 날 위해서 노력해 준 사람이야. 남에게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어. 마주에게 나랑 헤어지란 소리를 했냐면서 화내던 모습을 보고 나도 놀라서 헤어지자고 한 거니깐…"
육성호의 눈썹이 가운데로 몰려서 찌그러졌다. 화가 난 건지 억울한 건지 슬픈 건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인지 모를 표정에 입술이 더듬더듬 말을 내뱉으려 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육성호씨 일단 저희와 같이 서로 같이 가시죠."
"따라가면 제가 범인이 되는 겁니까? 제가 범인이 되는 거냐고요!"
흥분한 육성호와 달리 차분하고 단호한 형사의 목소리가 답했다.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피해자와 만난 분이라서 이야기를 듣고, 알리바이 확인을 할 예정입니다."
"유, 유나야! 이잇..!"
뭔가 말을 하려다 꾹 닫은 육성호의 입술이 소리를 내었다.
"그때 놀라게 해서 미안해. 너랑 헤어질까 봐 무서웠어.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날 평가하면서 너에게 나랑 헤어지라고 하니까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사랑해! 알지? 다녀올게!"
김유나는 육성호의 말에 응답해 주지 않았고, 두 형사와 함께 육성호는 경찰서로 이동했다. 형사들은 육성호를 가운데 두고 걸어가면서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는 등의 드라마에서만 보던 미란다 원칙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301호의 여자와 302호의 남자는 각자의 집 앞 현관에 서 있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제 처음 본 여잔데, 사실 내 팬이었다니…. 게다가 피해자의 친구이자 용의자의 전 여자 친구라니.'
"죄송해요…."침묵을 먼저 깬 건 김유나였다.
"제가 오빠 팬인데, 옆집에 살게 된 걸 알게 되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모르는 척했어요."
"아…. 예…."
"오빠 사진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팬끼리 교환용으로 만든 사진들이라서…스토커 같은 건 아니에요!"
아이돌 팬들이 앨범 속에 랜덤으로 들어있는 포토 카드 모으기에 열심히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직접 만들어서 서로 교환하는 건 몰랐었다. 게다가 아직 자신은 유명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자신의 굿즈를 만들고 교환하는 팬덤이 있을 줄이야. 김유나를 향한 의심스러운 눈빛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만약 정말로 순수하게 자신의 팬이라면 감사할 일이라는 마음까지 들었다.
"아. 그…. 제 팬이셨군요. 반갑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고른 말이었다. 동식이 불편해할까 눈치를 보던 유나는 금세 눈이 커져서 초롱초롱해져서 고개를 들어 동식을 쳐다보았다.
"감사해요!"
"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제 전 남자 친구가 불편하게 했는데 화도 크게 안 내시고, 저 같으면 엄청나게 화내고, 보기 싫어질 것 같은데."
"아. 그럴 수 있겠네요. 전 제 굿즈를 서로 교환할 정도의 팬덤이 있는지 몰랐어요. 그건 반갑고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사진을 보니 제 일상생활 사진도 몰래 찍은 게 있던데…"
"앗! 죄송합니다. 무대 출퇴근길만 찍으려다 그날 의상이 너무 찰떡이어서…."
살인 용의자가 떠나가자, 미팅 현장 같은 분위기로 묘하게 바뀌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동식은 사건 생각에서 멀어지자, 마음이 편해졌는지 우물쭈물 미안해하는 김유나를 보고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팬도 점점 생기고 인지도가 있는 배우가 되려고 아르바이트, 오디션, 작품활동, 운동, 대본 공부까지 쉬지 않는 쳇바퀴를 돌려왔었지. 그랬는데…'
냉장고 속 불청객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자신을 꽉 잡은 듯 느껴졌다.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 때문에 앞길이 막막해져서 억울한 마음이 올라왔다. 살짝 찡그러진 동식을 보고 김유나가 걱정되는 듯 말을 걸어왔다.
"성호 오빠가 뭔가 나쁜 짓을 한 거죠?"
"네?"
"찾아가서 화를 낸 것 말고도 뭔가 다른 일이 있던 것 아니에요? 밖에서 이러지 말고, 우리 집으로 잠깐 들어오세요. 커피라도 한잔해요."
김유나는 주변의 시선을 경계하듯 좌우를 살피고는 동식을 집으로 들였다. 김유나의 집은 동식의 집 구조와 같은 형태였고 가구들의 위치도 비슷했다. 그 때문일까 김유나의 집은 낯설지 않았다.
"하늘색을 좋아하시나 봐요. 집에 하늘색 물건이 많네요."
"네, 답답함이 사라지는 느낌이라 좋아하는 색이에요."
"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하늘색 좋아하는데."
“앗, 정말요? 오빠랑 통하는 점이 있네요!”
가벼운 취향 이야기를 하며 김유나는 손님맞이 준비를 하고, 좀 어색한 동식은 집을 두리번거렸다.
"기타 칠 줄 아세요?"
잘 보이는 곳에 거치대에 걸려있는 기타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기타를 만지작거렸다.
"아, 아뇨. 칠 줄 안다고 하기엔 도레미파 정도밖에 못 해요. 치실 줄 아세요?"
"네. 할 줄 알죠. 중고등학생 때는 음악 공부해서 피아노랑 기타를 배웠어요."
"어머! 잘 어울려요! 나중에 뮤지컬도 하시면 좋겠다."
쑥스러운 듯 동식은 기타를 들고 앉아 가볍게 코드를 몇 개 치며 틀어져 있던 튠을 바로 잡았다. 유나는 커피를 준비하다 동식에게 시선을 못 떼고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배우가 자기 집에서 기타를 치고 있다니. 행복해서 멈추고 싶은 시간이었다. 유나는 원두를 갈아서 내린 커피와 스틱 형태의 비정제 설탕 그리고 견과류가 들어간 빵을 두툼하게 썰어 테이블에 내놓았다.
"원두는 베리 향이 나는 산미 있는 원두고, 혹시 설탕 필요하면 쓰세요. 빵은 버터랑 설탕 없이 만든 빵이에요. 집 근처에 빵집에서 사 왔어요."
"아니에요. 충분합니다. 감사해요. 이 빵 혹시 거북이 빵집에서 사 오신 건가요?"
"맞아요! 거기가 이 동네에서 인기가 많죠. 거기 빵은 다 맛있는 것 같아요. 대부분 사람은 원두의 맛이 산미 있는 것보단 묵직한 맛을 선호하던데 저는 산미 있는 걸 좋아해서 원두가 이것밖에 없었네요. 괜찮으세요?"
“저도 산미 있는 맛을 더 좋아해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공통점이 많네요!”
반갑게 웃는 김유나가 자리에 앉고 조금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말을 먼저 이어간 건 이번에도 김유나였다.
"아까 제가 물어보고 싶었던 게. 성호 오빠가 용의자…. 잖아요. 제가 어제 말씀드린 거 기억하시죠? 우리 집 냉장고에 물건을 가져가는 범인은 이 근방을 잘 아는 사람 같다고."
다시 무거워진 이야기가 시작되자 동식도 웃음을 거두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유나의 말에 집중했다.
"저는 성호 오빠가 우리 집 냉장고 물건을 가져가지 않았을 거로 생각했는데, 동식 오빠와 관계를 오해했으면 괜히 우리 집 물건을 가져다가 동식 오빠네 가져다 뒀을 것도 같아요."
"네? 어째서요?"
"나중에 우리 집 물건이 오빠네에 있는 걸 알게 되면, 오빠가 절 정말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겠어요? 본인 집 물건을 좋아하는 배우의 집에 옮겨놓는 행동이 정상은 아니잖아요. 처음엔 티 안 나는 물건들로 시작해서 점점 눈에 띄는 물건들을 옮겨 생각이 아니었을까요.”
“그럼, 우리 집에 유나 씨의 물건이 있을 거로 생각하시는 건가요?”
김유나가 냉장고에 넣어 둔 여자 모양 레고블록이 동식의 냉장고에 있는 걸 보면, 동식의 냉장고 속 낯선 것들은 김유나의 집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육성호 가져다 둔 건 아니었다.
“혹시…. 아닌가요? 제가 잘못 생각했을까요?”
있다고 해야 하나 없다고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 동식은 김유나의 말을 곱씹는 척하며 바쁘게 생각해 봤다.
‘정말로 육성호가 살인범이고, 뒤집어씌우기 위해 우리 집 냉장고에 넣어 놓은 걸까? 그럼, 그 사람은 냉장고의 기이한 현상도 아는 거야?’
“못 보던 게 있던 것 같기도 하고….”
공식은 김유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생각하는 척 커피잔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