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 세상에 정직하고자 했던 우리의 자화상
- 세상 앞에 착할 수는 없는 것일까, 진실할 수는 없는 것일까, 정직할 수는 없는 것일까.
소설 속 인물은 한 인간처럼 출산의 과정을 통해 탄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징적인 알레고리 속에서 신화적으로 탄생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보티첼리의 명화 <비너스의 탄생>을 떠올려보자. 그림 속에서 비너스는 바다의 거품 속에서 ‘갑자기’ 탄생한다. 여기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속 주인공인 ‘나’역시 하나의 문장 속에서 태어난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그는 소설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한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나는 손해만 봐왔다.” 여기에서 주인공이 탄생했다. 이 문장은 소세키가 의도한 것인지 본문에서 무려 네 번이나 반복되는 구절이기도 하다.
‘나’는 정말 앞뒤 가리지 않는다. 어린 시절 괜한 의협심에 학교 2층에서 뛰어내리는가 하면, 칼이 잘 드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이 베기도 한다. 이웃 주민의 밭에서 친구들과 스모를 해 당근을 몽땅 짓뭉개버리고, 논에 물을 대는 수로 구멍을 막아 한해 농사를 망쳐놓을 뻔도 했다. 부엌에서는 공중제비를 돌다 갈비뼈를 크게 다친다. 이런 ‘나’에게 형이 불효자라며 꾸짖자 그는 홧김에 뺨을 때린다. 가족 모두가 그를 미워한다. 아버지는 ‘나’만 보면 이렇게 말한다. “네놈은 틀려먹었어!”(p.18)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죽고 마는데,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다름 아닌 “너 같은 놈은 이제 꼴도 보기 싫다.”(p.18)였다.
가족은 물론 모두가 ‘나’를 부정하고 미워한다. 하지만 이런 ‘나’를 귀여운 아이로, 기품 있는 도련님으로 여겨주는 이가 있다. 바로 늙은 하녀인 기요이다. “도련님은 올곧고 고운 성품을 지녔어요.”(p.19) 오직 그녀만이 ‘나’를 ‘도련님’으로 불러준다. 그녀는 장남인 형보다도 말썽꾸러기인 도련님을 더 사랑한다. 맛있는 것을 몰래 사다 주는가 하면, 용돈을 쥐여주기도 한다. “기요는 내가 장래에 출세하여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p.21) 유일하게 ‘나’라는 존재를 긍정해주는 인물이 바로 기요이다. 한 인간에게 사랑의 힘은 생각보다 지대한 것이다. ‘나’를 도련님이게끔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도련님으로 불리는 것은 맹목적인 사랑 때문만은 아니다. ‘나’에게는 그에 마땅한 올곧은 성품이 있다. ‘나’는 한 번 결심하면 하고야 만다. 아직 어린아이라 ‘정의’와 ‘선’의 기준이 없어 짓궂은 장난만 일삼는 아이처럼 보일 뿐이다. ‘나’에게 어떤 ‘가치’와 ‘규범’이 적립되면 도덕적인 인간, 진짜 도련님이 될 수 있다. 정말로 성인이 된 그는 정말 ‘앞뒤 가리지 않는’ ‘올곧은’ 도련님이 된다. 도련님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한 것을 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애써 속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인간관계를 위해 알랑거리거나 젠체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은 도련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련님을 세상 물정 모르는 샌님으로 여길뿐이다.
도쿄 토박이인 그는 성인이 되어 시골인 마쓰야마에 물리 교사로 임명된다. 교장은 첫날 그에게 말한다. 학생의 모범이 되고, 학교의 사표(辭表)로서 존경을 받지 않으면 안 되고, 덕으로 학생들을 교화하지 못하면 안 된다고. 으레 상사로서 할 수 있는 형식적인 말이다. 하지만 도련님은 월급 40엔에 그런 거창한 사명을 띠고 선생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말한다. “교장 선생님 말씀대로는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임명장을 반납하겠습니다.” 교장은 당황해 눈을 껌뻑인다. “지금 한 말은 그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선생님이 그 희망 대로 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p.32) 사실 그저 “예, 알겠습니다.” 하면 끝날 일이었다. 참으로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다. ‘나’는 교장이 그런 대답을 하자 생각한다. ‘그렇게 잘 알고 있다면 처음부터 겁을 주지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p.33)
도쿄의 올곧은 도련님은 시골 선생님으로 부임해 온갖 수모를 다 겪게 된다. 묵고 있는 여관의 처우가 형편없어 ‘행하(팁)’로 혼내주려고 하녀에게 큰돈을 건넨다. ‘촌사람들은 쩨쩨하니 5만엔 만 주면 놀라 자빠질게 뻔하다.’(p.30) 하지만 하녀는 왜 돈을 주는지도 모른 채 그저 넙죽 받는다. ‘하녀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은 그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이제 도쿄의 도련님은 샌님이 되고 만다. 학생들에게는 놀림거리가 되고 만다. 식당에서 덴푸라메밀국수를 먹었다고, 또 어느 날은 경단을 먹었다고 놀림을 당한다. 온천에 빨간 수건을 갖고 갔다고, 욕탕에서 헤엄을 쳤다고 놀림을 당한다. 숙직하는 날에는 밤새 기숙사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올곧은 도련님이다. ‘사람은 대나무처럼 곧지 않으면 미덥지 못하다. 올곧은 사람과는 싸움을 해도 기분이 좋다.’(p.113) 하지만 올곧은 도련님은 세상으로부터 샌님이라 불린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직장에서 어느 선생과도 잘 어울리지 못한다. 학생들에게는 놀림을 당한다. 하숙집 주인에게는 모함을 받아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남의 결혼 상대를 뺏은 것도 모자라 기생집을 들락거리는 선생의 이간질에 놀아나 동료 선생과 다툰다. 다툰 선생이 언젠가 사주었던 빙수 값 1전 5리가 마음에 걸려 그 돈을 도로 돌려주기까지 한다. 돈을 받은 동료 선생은 그를 어처구니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어느 날 월급이 인상된다는 소식을 듣지만 기뻐하기는커녕 교장에게 찾아가 인상을 거절한다. 동료 선생이 전근을 가게 되며 인상되는 것이라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우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거절하겠습니다.”(p.124) “그렇게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 앞으로 자네 신용에 문제가 될 걸세.” 교장은 말한다. 하지만 ‘나’는 단호할 뿐이다. “선생님 말씀은 지당합니다만, 저는 월급 인상이 싫어졌으니까 아무튼 거절하겠습니다. 생각해봤자 마찬가지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도련님의 올곧은 가치관에는 물질적인 것보다는 진실, 의리, 명예를 중요시한다.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원리, 세상 물정보다도 중요시 여긴다.
도련님은 시골에서 신임 교사로 지내며 끝까지 그곳 사람들의 정서와 질서, 그리고 세상의 이치에 동화되지 못한다. 도련님은 언제나 올곧으려고만 했다. 샌님으로 취급받으면서도 자신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올곧음으로 인하여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손해를 보고, 뒤통수를 맞고,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었다. 동료 교사들은 ‘나’를 두고 험담을 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 바보 같은 놈은 의협심 있는 도련님이라 귀염성은 있더라고요." “월급을 올려준다는데도 싫다고 하질 않나, 사표를 내고 싶다는 걸 보면 정신이 이상한 게 틀림 없어.”(p.169) ‘나’는 결국 세상의 매정함, 비열함, 추잡함, 냉혹함만을 보여준 마쓰야마에 경멸을 느끼며 도쿄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자신을 도련님으로 여겨주는 기요 곁으로 간다.
‘나’는 어느 날 세상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깨닫는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나빠지는 일을 장려하고 있는 것 같다. 나빠지지 않으면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한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간혹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을 보면, 도련님이라는 둥 애송이라는 둥 트집을 잡아 경멸한다. 그렇다면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윤리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지 마라, 정직하라고 가르치지 않는 편이 낫다. 차라리 큰맘 먹고 학교에서 거짓말하는 법이라든가 사람을 믿지 않는 비법, 또는 사람을 이용하는 술책을 가르치는 것이 이 세상을 위해서도, 당사자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p.76) 하지만 ‘나’는 이런 각박한 세상 속에서도 그저 도련님이고자 했다.
착할 수는 없는 것일까. 솔직할 수는 없는 것일까. 정직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잔인하게도 세상은 올곧고자 하는 도련님을 그저 샌님 취급할 뿐이었다. 결국 ‘나’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에’ 또다시 손해만 보고 말았다. 그렇다면 도련님이란 본성은 버릴 수 없는 것일까. 이제 세상이 무엇인지 알아챈 도련님은 어떻게 살아갈까. 마음을 나쁘게 먹고, 진실을 숨기고, 누군가에게 알랑거리며, 거짓과 위선을 일삼으며 살아갈까. 아니면 계속해서 샌님 취급을 당하며 손해만 보며 살아갈까. 도련님은 도련님이지 않을까. 바보 같은 도련님에게 연민이 드는 까닭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서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