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장 정리를 하려고 짐들을 다 꺼내놓으니 유독 여행 가방에만 눈길이 간다. 여행 가방은 보는 것만으로도 설렘이 이는 마력이 있는 물건인지 여행 가방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루한 일상에 식어버린 피의 온도를 다시 높이는 것이 여행이라면 누가 여행이라는 것을 마다하겠는가.
긴 여행을 많이 다니지 않았는데도 바퀴는 살짝 방향이 돌아가고 몸통은 여기저기 긁히고 눌린 흔적들이 많다. 가방의 상처들이 내가 멋진 여행가인 듯한 착각을 만들어준다. 저 가방을 끌고 다녀온 곳이라고 해봐야 고작 일본과 괌이었고, 그러고는 나처럼 벽장 속에서만 있던 가방인데도 제법 낡아서 여행에 닳은 느낌을 담고 있었다. 내 여행 가방은 여행으로 낡은 것이 아니라 기다림으로 낡아가고 있으므로 문득 시간을 흘러 지나오는 것도 여행인가, 그래서 인생은 여행에 비유되는가싶은 지나친 생각도 들었다.
가방을 열어젖히니 오래 갇혀 있던 먼지 냄새가 훅 터져 나온다. 이 가방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호텔방 바닥의 카펫에 쌓였던 먼지와 그 먼지 때문에 기침이 멈추지 않았던 밤도 떠올랐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시원한 탄산수처럼 가슴이 뻥 뚫리던 이국의 푸른 바다도 가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갑자기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상처를 아물게 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는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고 싶어진다. 풋내기 보헤미안처럼 별들과 구름이 지나가는 낯선 하늘 아래서 낯선 마을의 소음을 들으며 잠 깨어 아무 계획도 없는 며칠을 보내고 싶다. 훈훈한 밤공기 속에서 혼자 느끼는 자유는 얼마나 달콤한지 알고 싶다. 햇빛이 너무 맑아서 비어 있는 것 같은 곳을 가거나 삶에 감동하는 얼굴을 만난다면 여행 가방에 꼭 담아 오리라. 그런 여행을 하고 난 더 먼먼 훗날, 다시 여행 가방을 열었을 땐, 불쑥 꺼내보고는 울컥 울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번 시와 글은 저의 디카시집 『당신은 어떻게 사랑을 떠날 것인가』에서 골랐습니다. ‘디카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나는 기회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이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