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운진 Apr 26. 2023

[기차를 기다리며]

-여행 가방에 넣고 싶은 시 1


기차를 기다리며

-천양희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긴 길인지

얼마나 서러운 평생의 평행선인지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역은 또 얼마나 긴 기차를 밀었는지

철길은 저렇게 기차를 견디느라 말이 없고

기차는 또 누구의 생에 시동을 걸었는지 덜컹거린다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를 기다리는 일이

기차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며 쏘아버린 화살이며 내뱉은 말이

지나간 기차처럼 지나가버린다

기차는 영원한 디아스포라, 정처가 없다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기차역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기차역을 지나간 기차인지

얼마나 많은 기차를 지나친 나였는지

한 번도 내 것인 적 없는 것들이여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지나간 기차가 나를 깨운다

기차를 기다리는 건

수없이 기차역을 뒤에 둔다는 것

한순간에 기적처럼 백년을 살아버리는 것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도 기차역을 지나치기 쉽다는 걸

기차역에 머물기도 쉽지 않다는 걸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 2011.




    인적 없는 플랫폼.

    햇살이 먼저 와서 앉은 벤치에 햇살과 같이 앉아 길게 뻗은 철길을 본다. 나란한 철길은 아직 조용하다. 그런 정적 속에서 기차를 기다린다. 기차가 들어올 곳으로 반쯤 몸을 돌린 채 마음은 기차를 맞으러 저만치 나가있다. 멋진 저녁이 다가올 듯한 예감 같은 것이 온 몸을 감싸 안는다.      


    이 시의 제목을 읽고 나면 나는 매번 저 풍경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배낭 여행자의 모습으로 작은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것이다. 정처(定處)가 없다면 더 좋을 것이고, 이틀이나 사흘쯤 기차에 실려서 기차가 덜컹거리는 대로 마음도 덜컹거리며 모르는 마을들을 지나가는 상상을 한다. 바람이 불어가고 구름이 지나가고 시냇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나도 부유한다. 그렇게 일상에서 천천히 멀어져 낯설어지는 시간이 내가 애타게 찾는 위로라는 생각을 하며 시 속의 풍경에 스며드는 것이다.   

  

    마침내 기다리던 기차가 들어왔다가 금방 떠나간다. 아무도 내리지 않고 누구도 기차를 타지 않아도 기차는 멈추고 또 길을 간다. 얼마나 많은 기차역을 지나왔던 간에 기차는 또 지나간다. 우리의 삶도 그럴 것이다.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기차역처럼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머물기도 지나치기도 쉽지 않은 마음을 추스르며 매일 오늘의 역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희망과 원망 사이를 지나가며 무엇도 제대로 되돌려 받지 못하는 것이 삶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또 기차를 기다린다. 오늘 내 생에 시동을 걸고 덜컹거려줄 기차를 기다리며 어느 기차역에서 만날지도 모를 사람과 운명과 사랑을 생각한다. 어떤 간절함 끝에도 스치지 못하고 오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배우며 기차를 기다린다. 다음 기차는 나를 어디까지 데려갈까… (이운진)




작가의 이전글 [여행 가방에 넣고 싶은 시_글을 시작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