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우 Aug 14. 2018

레지스탕스를 떠나보내며

책에 싣지 못했던 이야기, 혹은 소설에 구구절절 덧붙이는 이야기

레지스탕스를 떠나보내며



- 작가의 말, 책에 싣지 못했던 이야기

- 혹은 소설에 구구절절 덧붙이는 이야기





레지스탕스를 세상에 떠나보내며




저항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저항이란 무엇일까요.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잠시 동의어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항의 동의어는 거부, 반항, 항전, 항거입니다. 무척이나 전위적이지요. 또한 저항은 물리학의 측면에서 보자면, 어떤 힘에 대한 반작용을 뜻합니다. 언제나 저항에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의미지요. 그렇다면 저항은 무엇을 향한 것일까요. 이는 반의어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저항의 반의어는 억압, 구속, 속박, 강압, 강제입니다. 감이 오시나요. 저항은 보다 강력하고 압제적인 외부의 어떤 힘에 대한 반작용입니다.



이러한 저항을 개인적인 영역으로 국한시켜 보도록 하죠. 저항이라고 하면 대개 파시즘을 향해 투쟁했던 독립투사나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들을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대의적인 저항가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자리가 되지 못합니다. 그저 미성숙하고 어리숙한 인간으로 분류되는 어느 청소년-혹은 소설 속 민재-을 떠올려보는 것으로도 충분하지요. 그는 분노에 가득차 있습니다.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세상이 그를 억압하고 강제하고 규정하려 했기 때문이죠. 그는 부모와 학교, 그리고 사회에 반기를 들기로 결심합니다.



처음에 그는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세상의 요구를 그저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었죠.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색깔을 잃어간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열망과 꿈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조금씩 꺾여 나간다는 것을 자각합니다. ‘해야 한다’와 ‘하면 안 된다’는 세상의 자명한 진리에 의문을 가집니다.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순응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마지노선을 긋고 물러서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무얼 지키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고유한 색깔과 개성을 가진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향해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레지스탕스’는 바로 이러한 존재 층위의 저항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무언가가 되기 위한 어리숙한 저항 말입니다. 레지스탕스를 통해 그려본 시인이 되길 갈망하는 젊은 예술가. 그리고 그의 열망을 억누르려는 세상. 저는 이 메타포로 무언가가 되고 싶지만, 세상으로부터 억압당하는, 그래서 저항하고 싶은 누군가를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치기 어린 저항의 메타포로 그들을 미혹하고 연대를 이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젊은 날의 반항은 언제나 한낮 웃음거리로 비춰지기 마련입니다. 소위 ‘철든’ 어른들에게 철회와 굴복을 강요받고 마는 것입니다.



문득 이 메타포는 부적응자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에는 만족하지 못해 저항해야만 하는 세상의 부적응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을 유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항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요구와 자신을 타협하고, 세상과 자신을 잘 조율해 행복을 좇으며 살아가지요. 또 어떤 ‘적응자’들은 권력과 유능함으로 세상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며, 세상과 타인을 주무르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 ‘레지스탕스’는 부적응자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최후의 보루에 선 부적응자들의 자기 자신을 갈구하는 몸부림, ‘레지스탕스’에 바로 그것을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실은 저항을 이야기함에 있어 빠뜨린 게 하나 있습니다. 저는 세상 속에서 갈망하는 ‘자기’가 되기 위한 실존적 의미의 저항만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저항의 목적이 되어버린 ‘자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습니까. 무엇을 꿈꾸지요. 당신이 갈망하는 것은 직업입니까, 사회적 위치입니까, 세상의 평판입니까, 이데아입니까.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교묘하게 회피하는 식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순수한 저항으로서의 ‘레지스탕스’는 그저 하나의 시도이자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 문제는 독자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두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세상에 레지스탕스를 떠나보냅니다. 제겐 씻을 수 없는 흉터를 남긴 열병이자, 돌이킬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얼룩진 저의 젊은 날의 초상을 말입니다. 세상에 나간 레지스탕스는 더 이상 저의 소관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정하지도,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제가 할 일은 부단하게 변호하는 것뿐이겠지요. 제가 감히 소망하는 것은 단 하나뿐입니다. 레지스탕스가 ‘저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순수한 저항 의지로 남겨지는 것. 그리하여 무언가를 갈망하는 누군가에게 영감과도 같은 막연한 이정표가 되는 것. 그뿐입니다.



이제 레지스탕스에 구구절절한 의미를 부여하는 짓은 여기서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말을 빌려 이만 글을 끝마치겠습니다.“반항은 인간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불가해한 삶의 공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