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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Jun 07. 2018

불가해한 삶의 공포

안톤 체호프적 공포에 대하여

불가해한 삶의 공포


; 신앙과 이성의 경계에서, 안톤 체호프적 공포에 대하여




우리는 세상을, 자연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두려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몰이해의 소산이다. 이해하지 못하면 공포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저 태곳적 수렵과 채집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우리의 조상을 떠올려보자. 흙을 파서 만든 움집이나 동굴에 살던 그들. 어스름이 짙게 깔린 어느 저녁 갑자기 천둥 번개가 내려친다. 온 세상을 번쩍이며 밝게 비추는 섬광, 천지를 뒤흔드는 뇌성, 대지에 내리 꽂힌 불빛은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다. 그들에게 천둥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공포는 극복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두려움은 사라진다. 우리는 공포의 대상인 천둥을 어떻게 이해했던가. 고대 그리스인들은 천둥을 올림푸스 최고의 신 제우스가 쓰는 무기로 생각했고, 성경에서는 <욥기>에서 보이는 것처럼 천둥을 하나님의 음성 또는 노여움으로 보았다. 이제 우리는 천둥을 볼 때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천둥은 이제 신의 표상이기에 오히려 신을 그 자체를 두려워하게 된 것이었다. 불가해의 존재는 신이 된 것이다.


신앙은 인류에게 있어 어언 이천 년 동안 세상을 이해하는 수단이 되어왔다. 모든 자연 현상은 신과 결부지어졌다. 이제 우리는 천둥, 번개, 지진, 홍수, 해일 심지어 역병을 마주하고도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이 신의 섭리였기에. 이 세상 유일한 공포의 대상은 신이 되었다. 신을 이해하면 우리는 또다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신은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해하려면 할수록 불합리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교부(敎父)로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신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라고.


18세기, 계몽주의와 함께 인간의 이성이 꽃피우기 시작했다. 신과 신을 논증하는 신학은 철저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신을 옹호하는 뜬구름 잡기 식의 독일 관념 철학 대신 영국의 경험론에 입각한 실용주의 철학이 대두하게 된다. 이제 세상을 신앙이 아닌 이성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신의 섭리를 배제한 채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신이 떠나가자 세상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규명되고 이해되었다. 1789년, 드디어 우리는 신앙을 끌어내리고 텅 빈 제단 위에 이성을 올려놓았다.




이성의 눈을 통해, 신앙의 눈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목적론적이게 마련이다. 더 나은 내일, 미래를 꿈꾸며 희망을 품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누구도 내일의 파멸을 바라지 않는다. 신앙의 세계에서 지상 최고의 목적은 현세가 아닌 사후의 세계에 있다. 천국에 가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고의 행복이자 가치이다. 하지만 이성을 믿는 사람은 사후의 천국을 믿지 않는다. 천국은 무엇으로도 증명할 수도, 규명할 수 없었기에. 하지만 이성의 인간 역시 천국과 비견되는 지고의 목적을 갖길 원했다. 드디어 인간은 천국을 사후의 세계가 아닌 바로 이 현세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헤겔의 변증법에 입각한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지상낙원을 사후 세계의 천국이 아닌, 가까운 미래에 곧 도래할 어떤 시대로 보았다. 그것은 바로 공산주의 사회였다. 목적의 왕국에 도달하기 위한 붉은 물결은 20세기를 뜨겁게 물들였다. 그 반대편에서는 신앙의 빈자리를 차지한 이성이 국가 그 자체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국가가 제시하는 완전한 미래를 향해 구성원들 모두 함께 힘을 모아 달려갔다. 국가가 믿음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수단은 목적을 정당화한다. 제국주의도, 군국주의도, 파시즘도 옹호되었다. 국가가 제시하는 방향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었기에.


그 결과는 참담했다. 제1차,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탄두가 떨어졌다. 홀로코스트로 유대인을 포함한 정치범, 동성애자, 전쟁 포로들이 1,500만 명 이상 무참히 살해되었다. 스탈린 치하에서는 1,500만 명의 소련인들이, 마오쩌둥 치하에서는 8,000만 명의 중국인들이 희생되었다. 식민지 지배를 받은 제3세계의 국가들은 참혹한 억압과 수탈을 받았으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핵탄두가 떨어졌다. 바로 이것이 이성을 맹신했던 시대, 20세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세상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모든 두려움을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그때, 오히려 인간은 공포 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신앙과 이성 그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여전히 창조론과 진화론은 승부를 내지 못했고, 신앙과 무신론은 치열한 대립을 벌이고 있다. 신앙의 시대와, 이성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는 그 어느 것을 맹신해서는 안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신앙으로도, 이성으로도 세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했기에. 그렇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세상이며 우리네 삶이다. 체호프의 말마따나 이해하지 못했기에 매일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사소한 감정에 휘말리며, 별 이득도 없는 대중적인 이슈에 정력을 소진하고 마는 것이다. 불가해할 수밖에 없는 세상. 이제 다시 세상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체호프 단편 <공포>가 수록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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