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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Mar 04. 2020

달콤한 허풍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면


첫 북토크에 오셨던 독자분들의 얼굴은 지금도 하나하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고작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귀한 걸음을 해주신 고마운 분들. 또 축하해주고 격려해주기 위해 오신 소중한 분들. 다들 아른거리지만 그중에서도 짙은 색채로 기억나는 한 분이 있다. 잊고 있던 나의 과거를 몰고왔으니 그럴법도 했다.

서초동의 한 스튜디오에 들어서던 그녀. 어디서 오셨냐는 물음에 그녀가 답했다. 나는 놀라고 말았다. 무려 저 남쪽 지방에서 기차를 타고 왔다는 것이었다. 과분한 걸음에 북토크 내내 잘해야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토크가 끝나고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무려 칠 년 전 대학교 교양 강의를 함께 들었다고 했다.

그녀가 말한 강의가 무엇인지 단번에 기억났다. 사랑을 듬뿍 받았던 강의이니 당연했다. 그렇게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받았던 시절이 없었다. 정말이지 대학 내내 사랑에 겨워 살았다. 사랑의 발단은 첫 과제였다. 자기소개를 원고지 3,000자 분량으로 써 오라고 했다. 과제를 제출한 다음 강의 시간, 교수님이 나를 강단으로 불렀다. 그리고 물었다. 자네가 쓴 글을 읽어주겠나?

나의 자기소개글은 조금 남달랐다. 그때는 지금과는 비교도할 수 없을 만큼 뜨겁게 문학에 취해, 아니 문학적 열망의 화신 그 자체가 되어 살았던 시절었다. 사실 그때까지 이렇다할 작품 하나 완성하지 못했으니 허세에 가득 차 있었다고 할 수 있다.자기소개에는 내가 왜 소설가가 되어야만하는지 장황하게 적혀있었다. 출사표를 썼던 제갈량을 떠올리며 비장하게 적어내린 글이라 치기 어린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글을 다 읽자 박수 갈채를 받았다. 교수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열망으로, 글로, 나 자신으로 박수를 받았던 건 생애 처음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나를 옆에 두고 교수님이 말했다. 여러분, 이 친구는 진짜 소설가가 될 것 같죠? 모두들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은 이에 그치지 않고 앉아있는 한 명 한 명에게 글에 대해 느낀점을 물었다. 글을 정말 잘 쓴다. 멋있다. 글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갖은 찬사를 다 받았다.

그 날을 계기로 나는 교수님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함께 두꺼운 책들을 읽어나갔고, 술잔을 기울이며 토론도 했다. 귀찮을 법도 한데 매주 써가는 나의 글을 진단해주셨다. 인생 이야기를 해주시기도, 다른 교수님에게 애제자라며 소개시켜주시도 했다. 그야말로 교수님의 편애를 받았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 읽었던 책과 썼던 글, 그리고 받았던 사랑은 엄청난 자양분이었다.

그동안 망각했던 과거가 밀려와 당황하는 사이 그녀가 말했다. 그때의 나를 아직도 기억한다고 했다. 소설을 쓴다고 해서 그때부터 나의 책을 마주하게 될 날을 내심 기다렸다고 했다. 그때의 말이 진짜가 되어, 기다림이 현실이 되어 기쁘다고 했다. 덕분에 와락 밀려왔던 칠 년 전 일은 감미로운 향기처럼 퍼져나갔다.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날의 기억을 감추고 있었다. 너무나 뜨거웠던 그 시절의 치기가 어딘가 부끄러워서.

하지만 그녀의 존재는 그날의 허풍을 허풍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부끄러웠던 과거는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 사실 아직도 나는 허풍에 젖어있다. 다만 글의 무게를 알만큼 교활해져 글이 아닌 뉘양스로 풍기고 다닌다. 행위와 태도에 짙게 묻어있다. ‘반드시 이 시대에 짙게 남을 그런 소설가가 될 거야’ 앞으로도 독자가 될 거라는, 차기작을 기다리겠다는 그녀의 인사는 아직도 내게 용기를 준다. 계속 허풍을 떨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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