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티나

소설가 이우, 포르투갈을 종단하다. 그 여덟번째 이야기.

by 이우

더워도 너무 더웠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태양은 그야말로 작열했다. 수은계는 40도를 가리켰다. 남성미 넘치는 구릿빛 피부를 갖겠다고 선크림도 바르지 않고 모자도 쓰지 않고 순례길을 걸었지만 이날 만은 달랐다. 햇빛이 너무 뜨거워 머리가 익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 배낭에서 자켓을 꺼내 머리를 덮고 얼굴만 빼꼼 내민 채 걸었다. 게다가 길 위에는 나무그늘 하나 없었다. 아잠부자에서 산타렘Santarém으로 가는 순례길은 토마토 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냥 토마토 밭이 아니었다. 광활하기 그지없는 토마토 왕국이었다. 길에는 어떤 상점도, 식당도, 카페도 없었다.


챙겨 온 샌드위치 두 개는 아침으로 이미 다 먹었고 생수 500ml도 모두 마신지 오래였다. 마치 푸르른 사막을 걷는 것만 같았다. 오늘도 역시 순례자는 없었다. 도움을 청할 농부도 없었다. 쉴 곳도 없었다. 계속 걸어야만 했다. 물도 밥도 없었지만 문득 내게 먹을 게 하나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계속해서 보이는 토마토가 바로 그것이었다. 서리는 엄연한 범죄였지만 굶주림에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빨갛게 잘 익은 토마토를 서너 개 땄다. 토마토에 묻은 흙을 티셔츠에 쓱쓱 닦고 한 입 깨물었다. 입 안에 상큼한 토마토의 맛과 향이 퍼져나갔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맛이었다.


걷는 와중에도 연신 감탄을 하며 토마토를 먹어치웠다. 토마토는 내게 양식이자 물이나 다름없었다. 어느정도 배가 차자 웃음이 밀려왔다. 태양 아래 재킷을 뒤집어쓰고 토마토만 먹으며 걷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습고 처량하게만 느껴져서였다. 길 위에는 온통 토마토 천지였고 양손에도 토마토가 들려있었다. 그야말로 토마토 축제에 온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유명한 스페인의 토마토 축제인 토마티나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토마티나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사람들이 던지는 토마토는 생각보다 아팠다. 얼굴에 정통으로 맞았는데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여서 그리 즐겁지 않았다.


토마티나 이후, 다신 홀로 축제에 가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또다시 토마티나였다. 그래도 토마토 덕분에 힘을 내서 산타렘까지 걸을 수 있었다. 토마토가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됐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토마티나를 너무 즐겼던 탓일까, 축제의 후유증은 너무 컸다. 정말 녹초가 돼서 산타렘에 도착했다. 몸이 말이 아니었다. 일단 더위를 잔뜩 먹었던 탓에 체력은 바닥나 있었고, 하루종일 토마토만 먹은 탓에 속을 다 버리고 말았다. 토마티나는 이렇게 위험한 축제였다. 나는 그날 저녁부터 끙끙 앓기 시작했고, 이튿날 새벽에는 일어나지 못했다. 알람을 끄고 하루를 쉬기로 결정했다.


모처럼 여유로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뜨거운 물에 아주 오랫동안 샤워도 했고, 잠도 실컷 잤다. 알베르게의 라운지의 쇼파에 반쯤 누워 책을 읽고 소설을 쓰며 반나절을 보냈다. 오후 네 시쯤 됐을까, 알베르게의 문을 열며 두 명의 순례자가 들어왔다. 홀로 순례길을 걸은지 사흘만에 처음 만나는 순례자였다. 그들은 거친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희 하루 종일 토마토만 먹었지?"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웃으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들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나도 어제 그 길을 걸었으니까." 그래도 토마티나는 내게 친구를 선물해주었다. 그들이 바로 산티아고까지 함께 걷게되는 빅토르와 라켈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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