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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Feb 12. 2018

문자옥(文字獄)

쓴다는 것에 대하여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실로 다양한 글을 쓴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 호혜와 아량을 청원하는 탄원서, 화려하게 자신의 역사를 적은 이력서, 세상에 고하는 격문이나 시국선언까지. 이러한 글 속에는 한 개인의 시선과 생각은 물론 목소리와 성격까지 담겨있다. 그렇다면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글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고 쓴다는 것이 즐거웠다. 거창하게 말해 쓰는 행위를 통해 생의 감각까지 느꼈었다. 집필한다는 것은 평소 말이 없던 내게 대화의 결핍도 해소시켜 주었을뿐더러, 문학적 열망까지 충족시켜 주었던 것이었다. 한데 돌이켜보면 그 희열 속에서 그동안 간과해온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글에는 대가와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편지에 담아 보낸 마음은 쉬이 번복할 수 없고, 탄원서에 적힌 청원은 마음의 빚이 되며, 이력서 한 장이 추후 우리의 행보를 결정짓고, 포고문 한 장으로 거대한 권력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세상에 드러낸 글은 필자筆者와 괴리되어 단순히 순수한 글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글은 필자와 세상 사이의 촉매가 되어 유기 반응을 일으킨다. 글을 쓴 필자는 어떤 방법으로든 글을 통해 세상과 엮이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날엔가 나는 교황청에 대한 나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었다. 중세 유럽의 정국과 역사를 좌지우지했던 교황청과 오늘날의 교황청을 비교 고찰한 글이었다. 작중에서 나는 전 세계에 평화적인 소프트파워를 행사하며 다니는 현 교황 프란치스코의 행보가 마치 지난날 교황청이 가졌던 세속적 권력의 부재를 만회하려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이러한 취지의 글을 세상에 내보냈다.


그저 쓰고 세상에 내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던 글. 어느 날 나는 이 글 때문에 고역을 치렀다. 한 신학과 교수가 나의 글을 비판했던 것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목사이기도 한 그는, 폴란드의 탈(脫) 공산화를 예로 들며, 교황청은 여전히 세속적인 영역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강력한, 유엔과 버금가는 종교단체이자 일종의 국제기구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도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그의 견해는 나의 글에 대한 비판이었기에.


나는 나 자신이 쓴 글을 옹호했다. 나는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보자면 유엔은 국제적 사태에 간접적 제재와 인도주의적인 호소 같은 소프트파워 밖에 행사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유엔이 그토록 개입했던 시리아 사태도 여태껏 계속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며, 교황청도 그저 유엔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고 했다. 교황청은 과거처럼 세상의 심판자이자 조정자이자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단 한 번도 굽히지 않고 나의 글을 끝까지 변호했다.


그렇다. 우리는 세상에 드러낸 자신의 글을 끝까지 변호해야 하는 것은 본능인 것이다. 우리가 쓴 글은 근원적으로 우리의 입장, 생각, 시선, 그리고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비판하고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스스로 내뱉은 말을 번복할 수 없기에, 스스로의 존재를 비판하고 철회하면 타격이 너무 크기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변호해야만 하는 것이다. 세상에 드러낸 자기 자신을 말이다.


때문에 나는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문자옥(文字獄)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집필한 글-그것이 어떤 형태이든-은 우리를 옥죄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써낸 글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 내보낸 글은 평생 꼬리표처럼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그 모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렇게 나 자신을 평생 옥죌 올가미를 스스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몽마르트에서 보냈던 지난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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