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치마와 백예린의 미지근한 여름
<써머송> 이라고 한다면 깨물면 점점 녹아드는 빨간 맛을 궁금해하거나 팥빙수에게 사랑한다고 소리치는 음악들을 떠오르기 쉽다. 듣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리듬 속에서, 우리는 계곡 속에 흐르는 물을 찾아 여행을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바람이 스치는 그늘에서 듣기 좋은 여름 노래도 있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닷속으로 뛰어들기보단 흔들거리는 야자수 아래 해먹에 올라타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 누구보다 그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시원한 여름에 어울리는 인디밴드의 3곡을 추천한다.
요즘같이 더운 여름, 타인과 살이 닿는 순간 앨범 아트와 비슷한 얼굴이 된다. 기분 나쁘게 끈적이는 감촉에 불쾌지수가 순식간에 치고 올라오지만 애써 표정 관리를 해 본다. 우리는 모두 지성인이기 때문이다. 30도를 웃도는 찜통 속에서 인내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작렬하는 여름에도 노을은 존재한다. 시계 초침이 엉거주춤하게 5시를 가리킬 때쯤이면 사정이 조금 나아지는 것이다.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슬슬 조깅을 나갈 채비를 하는 것이 작년 여름의 루틴이었다.
아도이의 그레이스는 정확히 오후 5시에 어울리는 음악이다. 만약 노을이 불타는 해변가에서 드라이브를 할 일이 생긴다면 이 곡을 재생해 보길 추천한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긴장이 풀어지는 시간, 늘어진 자신보다 더 늘어지는 음악을 들어보자. 굉장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며 온갖 고민이 미뤄지고 그 공백을 편안함이 채울 것이다.
젊음과 청춘의 잔상을 담아낸 아도이의 앨범, <CATNIP> 의 첫 번째 트랙이다.
Why don't you tell me you're breaking away?
Why don't you tell me this cannot replay?
So tell me where to go
백예린의 여름은 이렇게 아름다웠나 봐.
조회수 62만 회를 자랑하는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의 제목이다. 홀린 듯이 클릭한 뒤 summer를 처음 들었던 순간의 감상은 아직도 생생하다. 장마 주간을 겨우 지나 보내고 맞이하는 새벽 같은 곡이다. 이때 창문을 열면 비릿한 풀과 비 내음이 풍기지만 바람만은 어쩐지 산뜻하다. 숨을 크게 들이쉬면 얼음을 가득 입에 넣은 것처럼 서늘함이 찾아온다.
하지만 서늘함이 녹아든 음과는 달리 가사에서는 아이 같은 투정을 엿볼 수 있다. 내 방문은 뜯겨져 나갔었어, 하지만 네가 완전히 고쳐놓았지, 인정하긴 싫지만 볼멘소리로 고맙다고 하는 걸 듣고 있자면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런 화자가 솔직해지는 순간도 있다. 내가 도망치게 두지 말아줘, 내가 시덥잖은 것들로 싸워도, 내게 등을 돌리지 마 그런 가사를 듣고 있으면 누구든 붙잡고 싶은 기분이 든다. 위태롭고 이기적인 상대일지라도 전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오만함이 생겨난다. 끝내는 이렇게까지 생각한다.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가는 것이 진짜 사랑 아닐까?
Don't you let me slip away
When I fight for silly things
Don't show your back to me
When we fall down together
검정치마의 노래는 계절을 타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는 눈이 거리를 덮은 겨울을 가로지르며 감상하고, 누군가는 쓸쓸한 가을에 낙엽 따위를 밟으며 흥얼거린다. 하지만 나에게만큼은 검정치마의 노래들이 전부 여름이다.
그중에서도 EVERYTHING이 가장 그렇다. 특히나 도입부의 일렁대는 소리는 투둑대며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 같다. 장마철에 무서울 만큼 쏟아지는 폭우를 배경으로 이 음악을 듣고 있자면 세상의 모든 울적함을 떠안은 기분이 든다. 잡다한 생각들이 사라진 자리엔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고 오히려 공허하기만 하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어떤 날은 우울한 감정에 푹 빠져서 위안을 찾기도 한다. 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검정치마의 노래들을 전곡 재생 중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라면 EVERYTHING을 들으며 우울함마저 즐겨보는 건 어떨까? 눅눅하다는 이유로 싫어하던 소나기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넌 내 모든거야
내 여름이고
내 꿈이야
이런 여름이 있다면 저런 여름도 있다. 번화가에 어울리는 시원한 음악 속에서 색다른 반주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3곡을 추천해 보았다. 젊음과 청춘의 잔상을 담아낸 아도이의 Grace, 비가 내린 새벽의 공기 같은 더 발룬티어스의 summer, 장마 속에 파묻혀 울적해지는 검정치마의 EVERYTHING.
올해 여름은 인디밴드와 함께 미적지근한 여름을 즐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