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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 Oct 25. 2023

타고나길 파란빛이던 남자, 쳇베이커

[영화] 본 투 비 블루 Review

어떤 영화들은 감상하던 '순간'이 뇌리에 박힌다. 5월 1일에 우연히 봤던 중경삼림이 그랬고, 전날 먹다 남은 피자를 데운 뒤에 재생했던 본 투 비 블루가 그랬다.


밤을 꼬박 새우고 허기가 져서 냉장고를 뒤적였다. 어제 먹다가 남겨둔 피자를 전자레인지에 데워 온 뒤 볼만한 영화가 없나 뒤적거렸다. 오랜 고민 끝에 선택받은 건 '본 투 비 블루'였다. 재미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실존 인물의 삶을 담았다는 줄거리를 보고 지루하겠구나 생각했다. 잠에 들고 싶었으니 최적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두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도 잠에 들지 못했다. 해가 뜨고 있었다. 영화를 끝까지 본 뒤였다.




검푸른 한 방울의 마약이 삶을 파랗게 물들이다



  부모한테 사랑을 못 받고 자랐거나, 그런?

  아뇨. 누구 탓도 아니에요.

  그럼 어쩌다 신세 망쳤어요.

  그게 날 기분 좋게 하니까. 


쳇 베이커는 제인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는 마약을 하게 된 데에 구구절절한 사유를 덧붙이지 않고 명료하게 정의한다. 그게 날 기분 좋게 해서. 마약중독자에 대한 미화는 없다. 


그리고 중독에 대한 값을 톡톡히 치르게 된다. 약값을 갚지 못한 그에게 찾아온 빚쟁이들에게 폭행을 당한 것이다. 최근 출소한 재즈계의 레전드 쳇 베이커의 영화 제작은 그렇게 보류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목 부상에 안와골절, 앞니까지 전부 부러질 정도로 심한 폭행을 당한 그는 재즈와 작별하게 될 위기에 놓인다. 


꿈꿨던 화려한 재기는 무산되고, 쳇 베이커의 옆에는 만난 지 5주가 된 제인만이 남는다.



  

약을 하면 얼굴을 쓰다듬는 버릇이 있어


 

제인은 성심을 다해 쳇 베이커의 재활을 돕는다. 약물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메타돈을 꾸준히 복용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연주를 응원하며, 피자 가게의 사장에게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르냐며 따진다. 


그런 제인의 노력이 결실을 보는 날이었다. 


틀니를 끼고 피를 뱉어가며 트럼펫을 연습한 끝에 얻어낸 단독 공연이었다. 재즈 뮤지션들이 구름 떼같이 몰려들었다. 쳇 베이커 경력 최대의 기회였다.  


그리고 그 무대에서 쳇 베이커는 얼굴을 쓰다듬는다. 


마약을 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메타돈이 다 떨어진 그는 성공적으로 연주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약에 손을 대고 말았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제인은 자리를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약을 끊지 못한 쳇 베이커, 그를 끊어낸 제인



결말을 보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실존 인물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영화의 결말이 이런 식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영화 '위 플래시'와 '라라랜드'를 푸른빛으로 엮어낸 것만 같은 결말이었다. 


쳇 베이커는 결국 약을 끊지 못했지만, 제인은 그런 그를 끊어냈다. 그 대조가 인상 깊었다. 쳇 베이커 신기루가 '마약'이었다면 제인의 마약은 '쳇 베이커'였던 것 같다. 처음부터 위험한 남자라는 사실을 인식했지만 손을 대 버렸고, 자신마저 망가지기 전에 끊어냈기 때문이다.


그런 결말을 알고 나서 'Blue room'을 들으니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We'll have a blue room

  A new room, for two room

  When every day's a holiday

  Because you're married to me 


한때 파란 방에서의 행복한 결혼을 약속했던 둘의 모습이 느슨하고 낭만적인 음악으로 다가온다.


비록 모든 약속은 깨졌지만 음악만은 그 자리에 남아있다. 새삼스럽지만, 우리가 아직도 쳇 베이커를 사랑하는 이유가 그 선율들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했던 모든 말들이 사라져도 그의 음악은 영원히 세상을 떠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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