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생기면 참을 줄도 알고 그래라, 넌 이제 스물 다섯이잖냐
나는 대체로 사랑이 헤프지는 않은데 그걸 담을 그릇이 간장 종지만큼 작아서 상대에게 막 떠넘기곤 한다. 그래 놓고 답장도 받고 싶어 한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좋아하는 남자애한테 청기 올려 백기 올려 하듯이 너 나 사랑해 안 해! 사랑해 안 해! 역정을 내다가 어거지로 사귄 적이 있다. 사채업자가 꿔준 돈 받듯 얻어낸 사랑이 오래갈 리가 없으니 며칠 안 가 깨졌다. 지금은 걔한테 좀 미안하게 생각한다. 인스타 봤는데 좋아 보이더라. 항시 건강해라.
이후로 그래도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거 같다. 지난달에 좋아하는 화가에게 무작정 메일을 보냈다. 선생님 작품은 쩔어주고요, 한국에는 또 언제 오세요, 작품은 얼마입니까? 그 금액을 목표로 돈을 벌겠습니다. 이런 소리를 엉성한 사랑의 세레나데처럼 포장해서 보냈더니 감사하게도 오늘 답장이 왔다. 혹시? 했던 금액이 맞았고 앞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
혹은 같이 알바하는 사람이 좋아서... 언니 눈이 예뻐요 하고 다소 갑작스럽게 말 건넨다던가. 문제는 사실 이게 충동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거다. 나름의 심사숙고를 거친 뒤에 기침처럼 뱉어낸다. 그래서 더 문제다. 충동이면 순간을 참으면 되는데, 심사숙고는 오랫동안 억눌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굳이 왜 누르려고 드느냐, 할 텐데 이쯤 나이를 먹으니 멀리에서 던지는 사랑에는 가속도가 붙는 걸 알겠다. 그건 전달이 아니고 타격이나 다름없어서 상대방 입장에서는 공격인 것이다. 알바 언니는 약간 어색하게 웃었다.
그걸 깨닫고 나서도 참지 못한 일이 있는데... 사실 최근에 부산에 사는 블로그 이웃을 사랑하게 됐다. 그 사람은 아주 웃기고, 글을 정말 잘 쓰고, 짱 멋있는데 남자다. 그래서 2시간가량 내가 심각한 남미새라서 하다하다 인터넷에서 본 사람을 사랑하나? 심도있게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이성적인 느낌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80대 할머니였어도 난 인팁 할매의 노인정 일기를 밤새 읽었을 것 같아서.
그 정도로 사랑하는데! 블로그 글의 반을 내린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참지 못하고 님의 블로그를 사랑해요. 글 내리지 말아 주세요. 하고 비밀 댓글을 달았다. 짧은 댓글이었는데 사실 진심이었다. 모루 인형을 잘 만드는 그 부산 남자는 알까? 그냥 웃고 마는 걸 보면 별로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밷-보이 경향이 있으시다. 그냥 오로지 나를 위해서 등단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팬이 좋아하는 작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몇 번이고 문제가 없으니 나는 참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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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뒤로 내가 친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설명하다가 갑자기 민망해져서 싹 지웠는데 한다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심심하대서 이 글을 보내주고 평가받았는데 별로 느끼하지 않으니 올려도 괜찮겠다고 컨펌을 내려줬다. 그리고 내 얘기 왜 지웠냐며 아쉬워하길래 이게 친구 사이의 퍼포먼스인지 정말로 궁금한 건지 조금 헷갈려 하다가 다시 적는다.
언니는 내가 사랑을 퍼부어도 상관없어서 마음이 편하다.
왜냐면 칭찬을 들었을 때 약간 좀 티벳여우 같다.
헐 언니 진짜 깜찍하고 귀엽다. 왜 이렇게 귀여워? 하면
어그래고마워.
이러고 만다.
황-당.
사실 황당까진 아니고. 내 말에 흔들리지 않으니까 맘대로 들이부어도 마음이 편하다. 생각해 보면 내 친구들이 대체로 그런 거 같다. 와 너 정말 이뿌다! 하면 다 저런다.
그러니 나를 받아주는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이제부터 사랑을 참아야겠다.
하현상을 닮은 남자만 보면 홀라당 반하는 짓거리도 그만하고, MBTI가 I가 확실한 알바 언니를 보면 눈치도 좀 보고, 성찰인 척하면서 사랑 고백하는 이런 글도 그만쓰고.
마음이 생기면 참을 줄도 알고 그래라 지연아. 넌 이제 스물다섯이잖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