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 많은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장을 그만두고 일본 대학원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 수화기 너머로 들린 어머니의 한숨 섞인 한 마디를 기억한다.
공부가 그렇게 좋니?
대학원을 선택한 데는 불온하게도 학업에 대한 열정보다는 도피의 목적이 컸다. 하지만 유학하는 동안, 역시 공부만큼 내게 건전한 만족감을 주는 활동은 없다고 확신했다. 낮에는 고상하게 교수님과 언어와 문학에 관해 토론하고, 저녁에는 유학비를 감당하기 위해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삶은 코미디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집 밖을 나서는 내 얼굴에는 자유와 생기가 넘쳤고, 두고 온 삶에 대한 후회나 불안이 끼어들 틈 따윈 없었다.
공부가 그렇게 좋다면서 왜 석사에 그쳤냐고 묻는다면, 학자의 재목이 아니었다고밖에 대답할 수 없다. 나는 누군가가 구축해놓은 지식을 흡수하는 데는 약간의 소질이 있을지언정, 좁디좁은 학문의 미개척지를 파기에는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이다. 어쩌면 이 사실을 깨닫고 박사 과정을 깔끔히 포기한 것이 석사 과정의 수확이라면 수확이겠다.
결국 다시 돌아온 직장인의 삶. 커리어 면에서 일본의 문과 대학원은 전략적이지 못한 선택이었기에, 나는 30대 초반까지 신입사원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연봉을 받으며 여러 업계를 떠돌아야 했다. 그래도 그 과정을 통해 스트레스 없는 지금의 직장에 정착했고, 무명이지만 작가라는 ‘부캐’를 키우고 있으며,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며 미래를 그리고 있으니, 이만하면 잘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삶이 만족스러울 때 어김없이 찾아드는 달콤한 불청객이 있다. 바로 게으름이다. 20대를 견인한 것은 적성과 행복을 찾기 위한 갈망이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일터와 평온한 가정이 마련되고 나니, 변화나 도전에 대한 열망이 옅어진 것이다. 출퇴근하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소임을 다한 듯 남은 시간에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허송세월 하는 날이 늘었다. 넷플릭스에 기다리던 시리즈가 올라온 주말에는 이틀 내내 소파와 물아일체 되기도 한다. 출간 원고를 쓰고는 있지만, 원고를 쓰지 않을 때 다른 글을 거의 쓰지 않으며, 독서도 사색을 요하는 깊은 책보다는 흥미 위주의 장르에 탐닉한다.
그러던 최근 몇 달간, 미약하게나마 노화의 징후를 체감하며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누군가가 보기엔 아직 한참 어린 나이겠지만, 일반적인 기준에서 뇌를 제외한 육체적 정점이 지났음은 부정할 수 없다. 유전적 영향인지 10대에도 드문드문 보이던 흰머리가 이제는 잘라내면 한 움큼이라 공생을 선언했다. 모처럼 ‘셀카’를 찍을 때마다 발견하는 낯선 주름과 기미는 예사. 오래 걸으면 발이, 앉아 있으면 무릎이 찌릿하고, 튀김과 전에 사족을 못 쓰던 내가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곧바로 소화제 신세다. 몇십 년 후를 생각하면 엄살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내겐 지금까지 살아온 날 중에서 오늘이 가장 늙은 날이니 서글픈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은 내 몸이 늙어가고 있다는 자각이 인생을 허비하면 안 되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언제나처럼 공부다. 아직 완전한 아침형 인간은 되지 못했지만, 새벽 4시 반을 목표로 기상 시간을 앞당기는 중이다. 퇴근 후에도 2~3시간은 자기 계발에 할애하려고 노력한다. 그 시간에 하는 일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독서와 글 쓰기: 나의 두 번째 직업이기도 한 글쓰기. 출간 준비 중인 원고는 2년 동안 겨우 반밖에 완성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현재 진행형이다. 장바구니에 넣는 대부분의 책은 작성 중인 원고와 관련된 서적인데, 요즘은 정액제 사이트인 리디북스를 통해 관심사를 벗어난 책(금융, 경제, 메타버스 등)을 읽으며 시야를 넓히려 노력한다. 앱이나 이북 리더기를 활용하면 전철 안에서도 충분히 독서가 가능하다.
2. 프로그래밍: 대학시절 C언어 강의를 듣고 좌절했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보다 쉬운 프로그래밍 언어인 파이썬에 도전 중이다. 필요한 장비는 노트북과 인터넷, 독학 책 한 권이면 충분하다.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수준이지만,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즐거움이 있다.
3. 일본어: 유학을 준비할 때는 하루에 5~6시간씩 일본어 능력시험에 매달리곤 했는데, 몇 년 전부터 권태기가 찾아왔다. 자연스레 일본어 실력은 나날이 퇴화하는 중. 천천히 기본기부터 다지고자 손으로 상용한자를 쓰기 시작했다.
4. 골프: 남편의 권유로 시작해 조금씩 재미를 느끼고 있다. 격렬한 움직임이 없으므로 큰 운동 효과는 없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동작을 익히는 과정이 즐겁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골프 연습장이 도보 30~40분 거리(게다가 오르막 길도 있다)라 평일에 한 번씩 산책 삼아 다녀오고, 한 달에 두 번 주말 레슨을 받는다.
배우고 싶은 분야가 있다면 유튜브만 틀어도 무료 강의가 무궁무진한 세상이다. 강제적이고 일괄적이었던 학창 시절의 공부와 달리, 지금의 공부는 순수한 선택이다. 배워서 꼭 무언가가 될 필요도, 다른 사람과 경쟁할 필요도 없다. 쓸모없는 취미에 그칠지라도, 이 배움의 결과가 다가올 인생을 조금은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리라 믿는다.
비록 내 몸을 이루는 장기와 뼈, 관절, 피부와 머리카락은 서서히 늙어갈 지라도, 새로운 지식과 감각을 익히다 보면 어떤 면에서는 계속 성장하는 셈이다. 결혼 후에도 끊임없이 발전해나가며 삶에 대한 만족감과 경제적 능력을 유지하는 것. 부족한 형편에도 남부러울 것 없는 교육을 제공해주신 부모님에 대한 책임이자, 치열하게 살아온 내 10대와 20대에 대한 예의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