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가와현 가마쿠라鎌倉
가족은 어떤 의미에서 참 지독한 관계다. 아이는 자신이 태어날 부모나 가정환경을 선택할 수 없고, 부모 입장에서도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예측할 수 없지만, ‘천륜’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묶이니 말이다. 형제나 자매도 마찬가지. 물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만난 가족이 삶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만약 없는 편이 차라리 나은 사람들이라면, 가족은 그 어떤 관계보다 끈질긴 족쇄가 된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둘 사이에 태어난 자식으로 이루어진 화목한 가정. 일본 영화 감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는 가족에 대한 고착된 환상에 누구보다도 끈질기고 날카롭게 의문을 제기해 왔다. 실화를 소재로 한 그의 작품 「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2004)는 부모로부터 방치된 어린 사 남매의 비극을 다루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そして父になる」(2013)는 산부인과에서 뒤바뀐 아이를 6년간 길러온 두 가족의 사연을, 그리고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어느 가족万引き家族」(2018)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드나들며 가족처럼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에 비하면 네 자매의 성장담을 그린 「바닷마을 다이어리海街diary」(2015)는 비교적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이 영화에 나오는 가족도 결코 평범하지는 않다. 아버지는 15년 전 다른 여자를 만나 아내와 세 딸을 등진 채 집을 나갔고, 그로부터 1년 후 어머니마저 도망치듯 새 가정을 꾸려 떠났다. 부모의 부재를 메꾸며 고향 집을 지키는 것은 맏딸 사치의 몫. 똑 부러지는 간호사가 된 사치는 호탕한 성격의 은행원인 둘째 요시노와 스포츠 용품점에서 일하는 셋째 치카와 함께 단란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세 자매는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열다섯 살짜리 이복 여동생 스즈를 만나게 되고 홀로 남겨진 소녀에게 기꺼이 함께 살자고 손을 내민다. ‘언니들이 다 일하니까 너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어’라며.
처음 OTT 서비스에 등록된 영화를 봤을 때, 나는 혹시라도 스즈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나쁜 사건에 휘말리는 건 아닐까 싶어 내내 가슴을 졸였다. 그러나 섣부른 걱정과는 달리, 영화는 네 자매의 일상을 중심으로 고요하게 흘러간다. 이들이 한집에 살아가며 겪는 미묘한 관계의 변화나 내면의 파동에는 상냥한 시선을 유지한 채. 특히 자신의 출생으로 한 가정이 파괴됐다는 죄책감을 짊어진 스즈가 세 언니에게 차츰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은 언어와 표정, 그리고 몸짓을 통해 섬세하게 표현된다.
한 번 본 영화를 웬만해선 다시 틀지 않는 편이지만,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예외였다. 아니, 「바닷마을 다이어리」 덕분에 반복 감상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좀처럼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원작인 요시다 아키미의 8권짜리 만화를 사서 이틀 만에 독파하고, 다시 영화를 재생했다. 오리지널 만화의 확장된 세계를 알고 나니,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내포된 숨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세 번째, 네 번째부터는 습관적이었다. 반신욕을 하거나 소파에 누워 빈둥거릴 때, 심지어 글을 쓸 때도 작품을 수시로 틀어 놓았다. 익숙한 대사와 이따금 들려오는 시원한 파도 소리, 그리고 감성적인 악기의 선율은 어느덧 내 일상의 배경음악처럼 깊이 스며들었다. 돌아오는 휴일, 촬영지인 가마쿠라로 향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나머지 한 면도 바다를 접한 가마쿠라는 자연이 풍부하고 유서 깊은 휴가지다. 일본 역사에서 가마쿠라는 1185년, 무장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곳에 일본 최초의 무사 정권을 정립하며 화려하게 데뷔한다. 비록 왕의 반격으로 가마쿠라 막부는 150여 년 만에 무너졌지만, 문화재 보존을 위해 도시 개발을 제한한 덕분에 당시의 찬란했던 유산이 곳곳에 남아 있다. 한편, 끝없이 펼쳐진 바닷가를 따라 조성된 해수욕장과 야자수 길은 이국적인 풍광을 자아낸다. 전통의 향취를 간직한 수십 개의 절과 신사, 도시를 둘러싼 풍성한 녹음, 그리고 청춘들의 놀이터인 로맨틱한 해변. 여기까지만 해도 관광지로서의 매력은 충분하지만, 하이라이트가 남아 있다. 바로 「바닷마을 다이어리」 속 네 자매가 살던 고즈넉한 동네처럼 주민들의 잔잔한 일상이 모인 주택가의 풍경이다.
‘땡땡땡!’
노면전차 에노덴의 경쾌한 종소리를 들으며 고쿠라쿠지역에서 내렸다. 고쿠라쿠지역은 네 자매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역으로, 스즈의 등하굣길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장소다. 하나뿐인 개찰구를 나서자 수풀에 둘러싸인 아담한 시골 역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한눈에도 오래되어 보이는 목제 건물이지만, 밝은 녹색 간판과 울퉁불퉁한 돌계단, 그리고 입구를 지키는 새빨간 우체통이 촌스럽기는커녕 운치 있게 느껴졌다.
고쿠라쿠지역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영화 초반부, 유난히 부산스러운 아침을 보낸 스즈가 요시노와 함께 헐레벌떡 역으로 뛰어가는 풍경이다. 전차를 놓친 뒤 플랫폼에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둘. 여전히 언니들에게 존댓말을 쓰며 조심스럽게 대하는 스즈에게 요시노는 딱딱한 ‘요시노 상’ 대신 친한 사이에서만 쓰는 애칭인 ‘욧짱’으로 불러 달라 하고, 스즈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다. 곧이어 스즈에게 좋아하는 남자아이는 생겼냐고 짓궂게 물어보는 요시노. 스즈는 극구 부인하며, 모처럼 사춘기 소녀다운 표정을 짓는다. 나는 애써 어른인 척하던 스즈가 서서히 아이다움을 되찾아가는 이런 순간이 못 견딜 만큼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스즈와 요시노가 뛰어내려오던 언덕을 거슬러 올라가자, 영화 속과 똑같은 풍경이 반겨 주었다. 에노덴이 내려다보이는 다리와 나지막한 주택, 그리고 그림의 배경처럼 자리잡은 짙푸른 산…. 축구 연습을 마치고 돌아온 스즈가 잠시 비를 피하던, 붉은 처마를 가진 허름한 사당까지 그대로였다. 세트장에 온 착각이 들 정도지만, 베란다에 가지런히 널린 빨래와 수수한 차림으로 활보하는 주민들을 보니, 틀림없이 사람 사는 동네임을 알 수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주택가를 서성대니, 가마쿠라에서 70년을 사셨다는 할아버지가 말을 거신다. ‘어디서 왔느냐’라는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 ‘일본에 사는 한국인이에요’라고 대답했다.
“놀러 온 거야?”
“네,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고 왔어요.”
“아아, 「바닷마을 다이어리」 알지. 이 주변이 영화나 드라마에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몰라. 우리 집도 촬영하고 싶다고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었는데 시끄러워질까 봐 거절했어.”
그 말을 듣자, 영화 속 네 자매의 집으로 나온 2층짜리 고택이 떠올랐다. 요시노의 표현대로라면, 워낙 낡아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데다가 방에는 열쇠도 없는 목조 주택이다. 그러나 작품을 본 사람은 안다. 네 자매가 도란도란 시간을 보내던 다다미방과 툇마루, 그리고 매화나무가 심긴 널찍한 마당이 얼마나 소담스러운지. 일반인에게 공개된 장소라면 당장이라도 방문하겠지만, 실제로 주민이 사는 개인 주택이라고 들어 일찌감치 단념한 터였다.
그 대신 스즈와 학교 친구들이 즐겨 가던 식당과 카페를 방문했고,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원작 만화에서 인상 깊게 본 작은 신사와 가게도 부지런히 둘러보았다. 그렇게 온종일 이야기의 무대를 누비며, 나만의 추억을 덧씌웠다. 물론 내 여행은 사전 답사도 편집도 거치지 않은 현실이라, 모든 과정이 영화처럼 아름답지는 않았다. 스즈와 언니들이 맛있게 먹던 전갱이 튀김을 기대하고 간 에노시마의 한 식당에서는 똑같은 메뉴를 팔지 않았고, 만화에서 스즈가 요시노의 남자친구를 미행하던 어느 신사에서는 카메라를 떨어뜨려 고장내고 말았다. 또 스즈와 사치가 서로의 속마음을 터놓던 산을 찾아 2시간을 헤맸지만, 태풍 탓이었는지 등산로 입구가 폐쇄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전혀 아쉽지 않았던 이유는,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바다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네 자매는 이나무라가사키의 해안선을 거닐며 아버지의 기억을 반추한다. 스즈에게는 다정했을지 몰라도, 세 언니에게는 자신들을 버린 원망스러운 아버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치는 이제 언니들에게 스스럼없이 장난도 치는 막내 스즈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고백한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동생을 남겨준 아버지는 분명 다정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이나무라가사키는 가마쿠라의 해안선에서 유독 봉긋하게 돌출된 곶으로, 바다를 향해 기운 절벽의 소나무와 짙은 모래색이 어딘가 쓸쓸하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린 시절 분지에서 나고 자라서인지, 나는 바다를 보고 단 한 번도 설레지 않은 적이 없다. 맑은 날에는 물결과 함께 흔들리는 윤슬에 마음을 빼앗기고, 흐린 날에는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사라진 몽환적인 광경에 매료된다. 가마쿠라에 간 날은 후자였다. 발이 푹푹 꺼지는 모래사장을 하염없이 걸으며, 규칙적으로 몰아치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다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거센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면 모든 고민과 불안이 떠내려가는 느낌이 들고, 무엇에도 가려지지 않은 수평선을 보고 있으면 비뚤어진 마음이 곧게 펴지는 것 같다. 매일 바다를 마주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넓고 포근한 마음씨를 갖게 되지 않을까. 지금도 어디선가 온화하게 나이 들고 있을 것만 같은 바닷마을의 네 자매처럼….
JR 요코스카선, 쇼난신주쿠 라인 가마쿠라역鎌倉駅에서 노면전차인 에노덴江ノ電으로 환승한 뒤 느긋하게 산책하고 싶은 곳에서 내렸다. 에노덴 전 구간을 온종일 마음껏 타고 내릴 수 있는 노리오리쿤のりおりくん을 구입하면 더욱 알차게 여행할 수 있다. 도시가 넓고, 절과 신사, 박물관을 비롯한 관광 시설은 오후 4~5시 사이에 문을 닫으므로 여행을 일찍 시작하는 편이 좋다.
가마쿠라코코마에역鎌倉高校前駅
바다를 배경으로 달리는 에노덴을 담을 수 있는 장소 중 하나. 역에서 약 도보 1분 거리에 있는 가마쿠라고등학교 앞 건널목은 애니메이션 「슬램덩크」 오프닝에서 강백호가 채소연을 만나던 곳으로 유명해 팬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주소: 鎌倉市腰越1-1-25
가마쿠라 기네마토鎌倉キネマ堂
가마쿠라역 근처 맛집과 기념품가게가 즐비한 고마치도리 주변에 숨어 있는 레트로한 북카페. 일본 영화 포스터와 관련 서적, 굿즈를 판매하기도 한다. 가게 주인이 만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고 시라스 토스트와 진저 밀크티를 그대로 재현했다.
주소: 鎌倉市小町2-11-11
문의: www.kinemado.com
고쿠라쿠지역極楽寺駅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따스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고쿠라쿠지역. 시간이 천천히 흐른 듯한 플랫폼과 건물을 보면, 자연스레 영화 속 장면들이 떠오른다. 사치가 어머니와 함께 걷던 고쿠라쿠지極楽寺 절도 역에서 도보로 약 2분 거리에 있다.
주소: 鎌倉市極楽寺3-7-4
고토쿠인高徳院
1252년에 제작된 높이 약 11.3m의 청동 불상으로 잘 알려진 절이다. 푸른 하늘과 울창한 신록을 배경으로 고고하게 앉아 있는 가마쿠라 대불은 일본의 국보로도 지정되어 있다. 고토쿠인에는 아직 귀환하지 못한 우리나라 문화재인 간게쓰도觀月堂도 자리한다.
주소: 神奈川県鎌倉市長谷 4-2-28
문의: www.kotoku-in.jp
요리도코로ヨリドコロ
에노덴을 바라보며 일본 가정식을 즐길 수 있는 카페 겸 식당. 달걀흰자로 직접 거품을 만들어 밥에 올려 먹는 달걀간장밥과 감칠맛 나는 생선구이 정식이 일품이다. 창가 자리에 앉으려면 오픈 시간에 맞춰 방문할 것.
주소: 神奈川県鎌倉市稲村ガ崎1-12-16
문의: yoridocoro.com
이나무라가사키稲村ケ崎
검은 모래가 깔린 해안가에 튀어나온 작은 곶. 맑은 날에는 에노시마와 후지산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으며, 현지인에게는 노을 명소로 통한다. 건너편에는 당일치기로도 이용할 수 있는 이나무라가사키 온천稲村ヶ崎温泉도 있다.
주소: 神奈川県鎌倉市稲村ヶ埼1
하세데라長谷寺
바닷마을의 고즈넉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와 음식점, 박물관, 동굴 등 다채로운 볼거리를 갖추고 있다. 여름에는 약 2,500 그루의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는 산책로가 이목을 집중시킨다. 수국 시즌에는 예약제로 운영되거나 추가 요금을 받기도 한다.
주소: 神奈川県鎌倉市長谷 3-11-2
문의: www.hasedera.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