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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은 Sep 22. 2023

온천: 온기가 필요한 순간

군마현 구사쓰草津

세 번째 산책: 키워드, 낯선 사회를 들여다보는 창  


도쿄 소재의 대학원에 합격한 뒤, 나는 인터넷 사진만 보고 현지 원룸을 덜컥 계약했다. 학교와 가깝고 예산이 맞으며, 외국인을 받아주는 물건이 애초에 많지 않았다. 입국 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자취방에 들어갔는데,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아 안심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화장실을 보고 나서는 어린 시절의 꿈 하나가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다. 바로 욕조 있는 집에 사는 것. 어렸을 때 친척 집에서 처음 반신욕을 하고나서 품게 된 로망이었는데, 부모님은 샤워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있던 욕조도 없애는 분이셨고, 독립 후 서울에서 구한 빌라와 오피스텔에서도 샤워실 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 나이보다도 오래된 자그마한 대학가 원룸에 욕조가 있을 줄이야.


비록 플라스틱 재질에다 몸을 구겨 넣어야 할 만큼 비좁은 크기였지만, 태어나 처음 가져본 욕조는 그 후로 내가 가장 애정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외로움이 숨처럼 차오르는 날, 따뜻한 물속에 웅크리고 앉아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SNS로 안부를 묻곤 했다.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는 무료한 날에는 욕조에 들어가 몇 시간이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았다. 수업 시간에 발표를 망쳤거나 아르바이트에서 실수한 날에는 집에 돌아와 욕조 물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도 했다. 식어버린 물과 함께 땀과 눈물을 흘려보내고 나면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한 번은 반신욕을 하며 휴대폰을 보다 물에 빠뜨리는 바람에 고장내기도 했지만, 욕조 사랑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혼 후 넓은 집으로 이사하니 덩달아 욕조도 커졌지만, 이상하게 예전만큼 자주 찾지는 않는다. 


허름한 원룸에조차 욕조가 있었던 것은 일본 특유의 목욕 문화 덕분이 아닐까. 지금도 많은 일본인이 매일 같이 욕조에 몸을 담근다. 일본어로 ‘탕에 들어간다お風呂に入る’라고 표현하는 이 행위는 몸을 씻는 목적도 있지만, 그보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피로를 푸는 의식에 가깝다. 탕에서 나와 본격적으로 때를 벗겨내는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 사람은 몸을 꼼꼼히 씻은 다음 욕조에 들어간다. 한 번 받은 물을 버리지 않고 온 식구들이 돌아가며 사용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집에서 하는 목욕이 일상의 작은 기쁨이라면, 밖에서 즐기는 목욕은 색다른 추억이다. 일본 온천법상 온천이라고 불리려면 섭씨 25도가 넘거나 탄화수소나 리튬 이온 등 지정된 온천 성분 중 하나를 기준치 이상 함유해야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 세계 활화산의 7%가 밀집된 일본에는 이 기준을 통과하는 원천이 2만 7천 군데가 넘고, 그중 숙박 시설까지 갖춘 곳이 약 3천 군데에 이른다. 게다가 용출되는 지역에 따라 성분과 효능이 제각각이라, 직접 몸을 담그며 비교하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일본 3대 온천 하면 흔히 기후현의 게로 온천과 효고현의 아리마 온천, 그리고 군마현의 구사쓰 온천을 꼽는다. 모두 가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수도권에서 제법 거리가 있어 몇 년간 일본에 살면서도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10월 중순, 남편과 나는 그나마 도쿄에서 접근성이 좋은 구사쓰 온천에서 하룻밤을 묵어보기로 했다. 어느덧 다섯 해째를 맞은 결혼기념일을 자축하며. 





도쿄역에서 출발한 버스는 4시간 넘게 북쪽으로 달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삐죽삐죽 솟은 건물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높은 산봉우리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구사쓰 온천은 화산 활동이 활발한 산에 둘러싸인 해발 약 1,200m의 산간 마을이다. 버스는 산길을 한참 오르다 구사쓰 온천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여름과 가을이 줄다리기하던 도쿄와 달리 구사쓰에는 벌써 단풍이 울긋불긋했다. 고원 지대의 서늘한 공기와 대비되는 포근한 가을 빛깔을 감상하며 기분 좋게 첫 발걸음을 뗐다.




구사쓰 온천 여행은 유바타케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천 밭’이라는 의미를 가진 유바타케는 분당 약 4,000 리터의 온천수가 솟아나는 원천으로, 유황 성분이 높아 특유의 고약한 냄새가 특징이다. 


“윽…. 썩은 달걀 냄새!”


남편이 절묘한 묘사와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말처럼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가 유바타케와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내 수증기가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곳을 발견했다. 바짝 다가가 돌 울타리에 기대어 내려다보니 얕은 샘이 눈에 들어왔다. 침전된 온천 성분 탓에 바닥은 함박눈이라도 쌓인 듯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이곳에서 솟아오른 온천수는 일곱 개의 긴 나무 수로를 통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최고 온도가 섭씨 95도에 이른다는 물을 식하고 ‘유노하나湯の華’라고 불리는 유익한 온천 침전물 채취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온천수가 흐르는 방향을 따라 걸어 내려가 보았다. 그 끝에는 온천수가 시원한 소리를 내며 수로와 바위 위로 폭포처럼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 알맞은 온도로 맞춘 물은 주변 숙소로 보내고, 나무 통에 쌓인 유노하나는 두 달에 한 번 채취해 기념품으로 판매한다고 한다. 밭에서 난 쌀이 부엌으로 흘러들어가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우듯, 유바타케는 여행자의 몸을 쉬게 할 온천수를 끊임없이 만들어 나눠 주는 것이었다. 




유바타케를 한 바퀴 돌아본 뒤에는 근처에 자리한 공연장인 네쓰노유에 입장했다. 이곳에서는 온천수를 식히는 또 다른 방법인 ‘유모미湯もみ’를 관람할 수 있다. 사람 키만 한 평평한 나무 판을 물에 넣고 굴리듯이 휘젓는 것인데, 꽤 수고스러워 보였다. 차라리 찬물을 넣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온천의 좋은 성분을 희석하지 않기 위해 고안한 오래된 전통이라고 했다. 네쓰노유에서는 이 유모미에 구사쓰 민요와 춤까지 곁들여 관람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구사쓰 좋은 곳 한 번은 오세요

草津良いところ一度はおいで


다양한 연령대의 공연자들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구사쓰의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민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리듬에 맞춰 나무판도 바쁘게 움직였다. 춤은 현란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능숙하고 여유로운 몸짓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공연의 막바지에는 나무 판으로 온천수를 세차게 퍼올리는 동작이 나왔는데, 그 박력 넘치는 광경에 놀란 한 아이가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에 주변 관객뿐 아니라 공연자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유바타케에 이어 유모미까지 구경하고 나니, 구사츠 온천물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다.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 가시키리貸し切り 온천을 예약했다. 가족이나 커플끼리 단란하게 목욕을 즐길 수 있는 시설로, 숙소에 따라 무료로 혹은 소정의 이용료를 지불하고 일정 시간 빌릴 수 있다. 프런트에서 열쇠를 받아 문을 여니, 유바타케에서 왔을 온천수가 졸졸 소리를 내며 편백나무 탕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조심스럽게 탕에 들어갔다. 몸 구석구석 기분 좋은 온기가 전해졌다. 편백나무의 상쾌한 향과 어느새 익숙해진 은은한 유황 냄새도 한껏 들이마셨다. 잘 달군 프라이팬에 떨어뜨린 버터처럼, 몸과 마음의 긴장이 일시에 풀리며 노곤함이 찾아왔다.


구사쓰 온천 물은 pH 2.1에 달하는 강산성이라 대못을 넣으면 열흘 만에 형체가 사라진다고 한다. 게다가 온도까지 높으니 살균력이 탁월해 옛 무사들에게는 치료 약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무사 시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도 사냥을 가던 중 구사쓰에서 온천을 즐겼다고 하고, 일본을 통일한 세 무장 중 한 명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아예 구사쓰의 온천수를 에도까지 가져다 쓸 정도로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남편과 나는 사이 좋게 편백나무 탕에 들어가 그 귀한 물을 마음껏 쓰는 호사를 누렸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몸을 일으키니, 발갛게 익은 피부가 크림이라도 바른 듯 부들거렸다. 




그러고 보면, 유학생의 신분으로 혼자 타지 생활에 적응해나가던 무렵 자취방에 있던 플라스틱 욕조는 몸도 마음도 벌거벗은 채 쉴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표정이나 감정을 모조리 토로할 수 있는. 어쩌면 결혼한 후로 더 이상 욕조로 숨지 않게 된 것은, 한 집에 사는 든든한 내 편이 그 역할을 대신해주어서는 아닐까.


도쿄로 돌아오는 버스에 타기 전, 유바타케 근처 기념품 가게에서 구사쓰 온천 향이 난다는 입욕제를 잔뜩 샀다. 덕분에 한 동안 유황 냄새가 가득했던 결혼기념일의 여운을 집에서도 음미할 수 있었다.




산책 tip

도쿄역東京駅이나 신주쿠 버스터미널バスタ新宿 등에서 출발하는 JR 버스를 타면 구사쓰 온천 버스터미널草津温泉バスターミナル까지 한번에 갈 수 있다. 이동 시간을 단축하려면 우에노역上野駅에서 특급 구사쓰 열차를 타고 나가노하라쿠사쓰구치역長野原草津口駅에서, 혹은 도쿄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가루이자와역軽井沢駅에서 내려, JR 버스로 갈아타는 방법도 있다. 

구사쓰 온천 버스터미널역에서 내린 뒤 유바타케를 중심으로 한 관광 명소와 식당, 카페, 기념품 가게는 도보로만 둘러봤다. 구사쓰 온천 정내 순회 버스草津温泉町内巡回バス도 다닌다. 당일치기로 즐길 수 있는 대중 온천과 무료 온천, 족욕탕도 많지만, 여유가 있다면 온천을 보유한 숙소에서의 1박을 추천한다. 


가 볼 만한 곳

마쓰모토まつもと

조슈上州 지역의 밀가루를 사용한 폭이 넓고 얇은 히모카와 우동ひもかわうどん을 제공하는 우동 전문점. 지역 특산물인 잎새 버섯 튀김도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유바타케에서 도보 2분 거리이므로 구경을 마치고, 우동 한 그릇으로 허기를 채워보자. 

주소: 群馬県吾妻郡草津町大字草津486-5

문의: 0279-88-2678


네쓰노유熱の湯

180 cm 길이의 나무 판으로 물을 저어 식히는 유모미를 구성진 노래와 춤과 함께 구경할 수 있다. 1960년에 시작됐으며 2015년, 2층 규모의 공연장으로 리뉴얼 오픈했다. 유모미 외에도 라이브 재즈나 기타 공연과 같은 특별 이벤트가 비정기적으로 개최된다. 

주소: 群馬県吾妻郡草津町草津414

문의: www.kusatsu-onsen.ne.jp/netsunoyu


사이노카와라 공원西の河原公園

계곡에서 솟아난 온천수가 곳곳에 따뜻한 에메랄드 빛 연못을 만들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자연 속에서 노천탕을 즐길 수 있는 유료 시설인 사이노카와라 노천탕賽の河原露天風呂도 유명하다. 유바타케에서 상점이 늘어선 사이노카와라도리西の河原通り 거리를 통과해 10분쯤 걸으면 도착한다.

주소: 吾妻郡草津町草津521-3

문의: sainokawara.com



시라네 신사白根神社

구사쓰 온천을 처음 발견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인물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やまとたけるのみこと를 모시는 신사. 유바타케에서 출발할 경우 가파른 오르막길을 약 4분 간 올라야 하지만, 그 덕분에 온천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주소: 群馬県吾妻郡草津町草津538

문의: 0279-88-376


야마비코 온센 만주山びこ温泉まんじゅう

팥 앙금을 넣은 빵을 증기로 쪄 낸 온센만주는 온천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먹거리다. 야마비코 온센만주에서는 그냥 먹어도 맛있는 만주를 튀김으로도 제공한다. 튀김 옷에 검은 깨를 넣어 고소하고 따끈따끈한 아게만주あげまんじゅう로 출출함을 달래보자.

주소: 群馬県吾妻郡草津町草津118-2

문의: 0279-88-3593


유바타케湯畑

구사쓰 온천을 상징하는 원천. 주변에는 온천수가 흐르는 수도와 발을 담글 수 있는 족욕탕도 마련되어 있다. 밤에는 다섯 가지 색의 조명을 번갈아 가며 비추는데, 자욱한 수증기 덕분에 한층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주소: 群馬県吾妻郡草津町草津문의: 0279-88-7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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