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하다. 참 유난한 삶이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탄식이 나왔다. 소설 <모순>의 안진진이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나의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라고 외쳤다면, 나는 지나치게 충실한 나의 삶에 조금은 질렸던 것 같다.
목표가 생기면 성취할 계획을 세운다. 노력해도 이루지 못했다면, 차선을 택한다. 하루하루 주어지는 즐거움에 집중했던 시절은 초등학교 때 막을 내렸다. 중학교 때는 특목고 입시를, 고등학교 때는 대입을 바라봤고, 성인이 되어서는 취업이나 결혼, 자아실현이 새로운 과녁이 되어 주었다.
자유롭게 부유하듯 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것은, 원하는 것이 없을 때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해서라는 걸, 조금 늦게 알았다. 슬픔과 외로움은 타고난 몸속 장기 같아서, 아주 어릴 때부터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캐물었다. 일련의 사건으로, 때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손바닥 뒤집듯 넘어갈 수 있음도 알았다.
무언가에 몰입하지 않는 상태에서 나는, 언제든지 슬픔과 무기력함에 끌려내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 당장 원하는 바가 없다면, 경계를 건너는 과정이 힘들고 아플 뿐, 그 너머는 지금보다 편안하리라는 생각이 시시때때로 틈입할 것이다. 서른셋인 지금도, 열셋의 그때도 그랬으니, 마흔셋이라고 다를까.
'너는 목표가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이잖아'라고, 누군가 말했다. ‘너는 생존해야 하는 사람이잖아'라고 들렸다.
작년에는 <콜센터의 말>을, 올해는 <도쿄 근교를 산책합니다>를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살았다.
올해는 보다 자유로워지기로 했고, 내년에는 보고 싶은 풍경이 있다.
빚을 갚고, 소설을 완성하고, 내 공간을 마련해야겠다. 어쩌면 언젠가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품을 수 있도록.
오로라에도 사파리에도 시큰둥한데, 유일하게 흥미가 생기는 코모도 섬도 가 봐야지.
그러니 그때까지 살아 봐야겠다.
슬픔의 바다 속에서 드물게 반짝이는 작은 욕망들을 주우며, 유난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