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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은 Sep 22. 2023

돈부리: 섞이지 않을 자유, 그리고 외로움

가나가와현 에노시마江の島

첫 번째 산책: 음식, 오래 기억될 맛과 향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필연적 거리는 우리를 자유롭게도 하지만, 이따금 사무치는 외로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특히 혼자만의 공간이 발달하고 타인의 삶에 쉽게 개입하지 않는 일본 사회를 경험해 보았다면, 그 물리적, 정서적 거리감이 지닌 양면성을 한 번쯤 느껴보았으리라.


모처럼 고독을 음미하고픈 여행자에게 일본의 대도시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지다. 일찍이 혼자서 밥먹는 문화가 정착된 덕에 1인 테이블과 카운터석이 마련된 식당과 카페, 술집이 즐비하다. 한 몸 누이기 딱 좋은 저렴한 1인 실이나 캡슐 호텔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나 홀로 쾌적한 여행을 만끽하기에 이만한 곳이 또 있을까.


하지만 혈혈단신 일본 땅에서 살아가는 입장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엇이든 서로 공유하며 친해지는 우리나라 사람들에 비해 일본인은 내 것과 네 것의 구분이 확실한 편이다. 친한 사이에서도 더치 페이가 기본이고, 연애나 결혼 여부와 같은 사적인 질문도 잘 하지 않는다. 친구와의 약속도 맛집 예약하듯 한 달 전쯤 잡다 보니, 즉흥적인 만남은 상상하기 어렵다. 매일 같이 연락하거나 갑자기 집 앞으로 찾아갈 수 있다는 커플도 우리나라에서만큼 잘 보지 못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팀에서 일하더라도 휴대폰 번호는커녕 라인 계정을 모르는 경우가 많고, 점심도 각자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운 정 문화에 길들어져 있다면, 일본 생활에서 불쑥불쑥 찾아드는 고립감은 견디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나는 두 나라의 밥 요리에 곧잘 빗대곤 한다. 우리나라의 비빔밥이나 식사의 마지막에 나와 우스갯소리로 ‘코리안 디저트’라고도 불리는 볶음밥은, 밥과 토핑이 한 몸처럼 뒤범벅된다. ‘우리’라는 틀 안에서 말 그대로 지지고 볶으며 서로에게 동화되는 인간관계를 보는 듯하다. 한편, 일본의 덮밥인 돈부리丼는 토핑과 흰 밥의 경계가 뚜렷하다. 입에 넣기 직전까지도 둘을 완전히 섞지 않음으로써, 재료 본연의 맛을 유지한다는 점도 큰 차이다. 혹시 아무리 친한 사이에서도 타인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일본인의 성향이 무의식 중에 음식에도 반영된 것은 아닐까. 


어느 쪽이 맞고 틀리다고 할 수 없는 문화 차이일 뿐이지만, 음식 취향만 보면 나는 덮밥 파에 가깝다. 재료 하나하나의 맛을 음미할 수 있는 데다가, 숟가락을 뜰 때 마다 밥과 재료의 비율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다. 그러다 보니 일본을 여행할 때도 현지 특산물을 활용한 덮밥이 있으면 꼭 한 번씩 먹어 보는데, 에노시마의 시라스 덮밥 혹은 ‘시라스동しらす丼’도 즐겨 찾는 메뉴 중 하나다. 


사가미만을 면한 가나가와현 에노시마는 둘레 4km에 불과한 섬이지만, 자연이 빚어낸 해식 동굴과 552년부터 존재한 유서 깊은 신사 덕분에 오랫동안 관광 명소로 사랑받아 왔다. 멸치나 정어리, 은어 등의 치어를 일컫는 시라스しらす는 에노시마를 대표하는 특산품으로, 매년 봄이 되면 태평양의 구로시오 난류를 타고 에노시마가 떠 있는 사가미만으로 들어온다.


덕분에 에노시마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시라스를 다양한 방식으로 즐겨 왔다. 김처럼 얇게 이어 붙인 뒤 바싹 말린 다다미이와시たたみいわし는 수백 년 전부터 만들어 먹었다고 하며, 1960년대 이후에는 냉장고가 보급되면서 갓 잡은 시라스를 한 번 삶은 뒤 햇볕에 건조한 덴피보시시라스天日干ししらす와 소금물에 살짝 데치기만 한 가마아게시라스 釜揚げしらす, 그리고 날것 그대로 먹는 나마시라스生しらす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피자와 파스타, 심지어 아이스크림에까지 시라스를 넣은 진풍경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가 꾸준히 찾는 메뉴는 역시 윤기 나는 흰 쌀밥에 가마아게시라스나 나마시라스를 듬뿍 올린 덮밥, 시라스동이다.




모처럼 시라스동이 생각나 에노시마로 향한 어느 겨울날. 하늘은 지나치게 푸르고 선명해서 마치 증명사진의 배경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그 아래에서는 파도에 부서진 햇살이 그 어떤 보석보다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후지사와에서 에노시마로 향하는 다리를 건너기 전, 탁 트인 바다 앞에 위치한 신에노시마 수족관을 먼저 방문했다. 수조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시라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신에노시마 수족관의 코너 중 하나인 시라스 사이언스シラスサイエンス는 시라스를 주제로 한 아마도 세계 최초의 상설전이다. 수족관에서 직접 번식과 사육을 도맡고 있으므로, 사진과 동영상은 물론 수조를 통해 시라스의 성장 과정을 생생히 관람할 수 있다. 식탁 위에 오르는 시라스는 대부분 태어난 지 1개월쯤 된 치어로, 비늘이 아직 돋지 않아 온몸이 투명하고, 움직임도 굼뜨다고 한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한 쪽에서 부화한 지 2개월이 지난 시라스 떼가 회오리를 만들며 헤엄치고 있었다. 손톱만한 은빛 물고기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신비롭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했다. 다른 한쪽에는 새끼손가락만큼 자란 성어가 유려한 몸짓으로 짙푸른 수조를 헤집는 중이었다. 에노시마 수족관에서 기르는 시라스 종은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쓰는 멸치이므로, 생김새는 친근했다. 그렇지만 요리의 재료가 아닌, 해양 생물로서 전시된 시라스를 보는 일은 무척 신선한 경험이었다. 우리는 보통 음식을 먹으면서 그 재료가 살아 있었던 과거나 살아 있었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상상하지 않으니 말이다. 


수족관을 나와 바다를 가로질러 에노시마로 향했다. 모래사장에서 흙을 가지고 그럴듯한 돌고래를 만드는 청년들, 후지산이 보이는 해변에서 기모노를 입고 촬영에 열중하는 커플, 그리고 겨울 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보드 하나에 의지해 파도에 몸을 맡기는 서퍼들…. 다리를 건너며 스치는 휴양객들의 비일상적인 모습에 덩달아 마음이 들떴다.



점심을 해결하러 들어간 시라스 전문점은 넉넉한 양과 화려한 비주얼로 SNS에서 소문 난 가게였다. 당일 에노시마 주변에서 잡힌 나마시라스를 고집하는 철칙으로도 유명한데, 아쉽게도 내가 방문한 겨울에는 자원 보호를 위해 시라스 잡이를 금지하고 있었다. 메뉴판을 펼치니, 시라스뿐 아니라 각종 회와 튀김 등 다양한 토핑을 조합한 덮밥 종류가 20여 개에 달했다. 한참 고민하다 주문한 요리는 연어회와 연어알, 그리고 가마아게시라스가 나란히 올라간 해산물 덮밥. 조금 과장해서 세숫대야만 한 그릇에 당근과 무, 상추 등 갖은 채소와 해산물이 듬뿍 담겨 나왔다. 실처럼 얇고 새하얀 시라스는 수족관에서 본 것과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비린 맛 하나 없이 산뜻하고 부드러웠지만, 아삭한 채소에 기름진 회까지 곁들이니, 시라스만의 매력이 반감되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나는 몇 개월 전 여름, 분사 식당에서 맛본 심플한 시라스동을 떠올리고는 괜한 욕심을 부린 선택을 후회했다. 관광지에서 약간 떨어진 한적한 골목에 자리잡은 분사 식당은 여행객보다는 동네 주민이 즐겨 찾는 소박한 가게다. 흰 쌀밥에 짭조름하 가마아게시라스를 눈처럼 소복이 쌓고, 약간의 김과 시소, 간 생강만을 곁들인 이곳의 시라스동은 가정에서도 쉽게 만들 법한 모양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시라스의 은은하고 고소한 향과 겉은 탱탱하고 속은 포슬포슬한 식감이 오롯이 두각을 드러낸다. 간장을 한 바퀴 두른 뒤 밥과 함께 먹으면 감칠맛이 훨씬 살아난다. 보기에는 심심하지만, 먹는 내내 굳이 무언가를 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선호하는 시라스동의 스타일은 다채로운 맛이 만들어내는 풍성한 하모니보다는 한 가지 재료의 고독한 독주였던 것이다.



후회를 털어내려 더욱 씩씩하게 걸은 에노시마는 언제나처럼 아름답고, 또 조금은 쓸쓸했다. 다리 하나로 육지와 간신히 연결된 자그마한 섬은 반나절이면 충분히 일주할 수 있지만, 늘 시간에 쫓겨 꼭대기에 있는 전망대만 보고 내려오곤 했었다. 그날은 처음으로 망망대해가 펼쳐진 섬의 끝자락, 지고가후치 해안까지 느긋하게 돌아봤다. 그리고 수면에 황금빛 길을 내며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문득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나의 처지가 작은 섬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던 시절의 나는 고독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직장 상사들은 출근에서 퇴근까지의 모든 시간은 물론, 때로는 저녁과 주말에도 부하 직원과 함께하려 했고, 가족은 내 미래의 배우자 걱정에 여념이 없었으며,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 역시 취업과 결혼, 출산, 내 집 장만으로 이어지는 천편일률적인 가치를 강요하는 듯했다. 


반면, 익숙한 생활과 관계를 뒤로하고 떠나온 일본에서는 고독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이방인이라는 신분은 현지 사회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해주는 방패임과 동시에 넘어서기 힘든 벽이기도 하다. 일상 생활과 직장에서 종종 현지인과 교류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언어와 문화 상식 때문인지 가끔은 ‘섬 안의 작은 섬’이 되어 살아가는 기분이 든다. 에노시마처럼, 혹은 덮밥처럼 주변과 섞이지 않고 살아가는 이 쓸쓸한 자유가 싫지만은 않지만, 가끔은 가족과 친척, 친구와 격의 없이 부대끼며 살던 시절이 생각난다. 타지에서 호젓한 생활에 만족하면서 마음 한편으로 고국의 끈끈한 정을 그리워하는 일. 자발적으로 경계인의 삶을 택한 모든 이들이 안고 가야 할 모순이 아닐까. 




산책 tip

오다큐에노시마선 가타세에노시마역片瀬江ノ島駅 또는 에노덴 에노시마역江の島駅을 기점 삼아 산책을 시작했다. 신주쿠에서 출발한다면 후지사와역까지의 왕복 승차권과 후지사와역에서 가타세에노시마역 사이의 오다큐선 전철 이용권, 그리고 에노덴 1일 승차권 등을 포함한 에노시마·가마쿠라 프리패스江の島・鎌倉フリーパス가 편리하다.

섬 산책은 얼마나 꼼꼼히 둘러보는가에 따라 한두 시간에서 한나절 이상이 소요될 수 있으며, 가마쿠라와 가까워 동시에 여행하는 사람이 많다.  경사진 에노시마를 걸어서 오르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유료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할 수도 있다. 에스컬레이터 이용료에 사무엘 코킹 가든과 시캔들 전망대, 이와야 동굴 입장권을 더한 에노패스エノパス도 판매한다.



가 볼 만한 곳

분사 식당文佐食堂

정겨운 간판과 가게 인테리어처럼, 음식도 기교를 부리지 않은 단순하고 정직한 맛을 자랑하는 식당이다. 시라스동을 비롯한 덮밥 메뉴와 라멘, 그리고 사시미와 조개찜을 비롯한 해산물 요리를 자랑한다. 

주소: 神奈川県藤沢市江の島1-6-22

문의: 0466-22-6763



신에노시마 수족관新江ノ島水族館

맑은 날에는 에노시마는 물론, 후지산까지 조망할 수 있는 해변가의 수족관. 사가미만의 해양 생물을 전시한 사가미만 존과 해파리의 율동을 감상할 수 있는 해파리 판타지 홀, 그리고 바다 거북을 구경할 수 있는 실외 해변이 인상적이다. 

주소: 神奈川県藤沢市片瀬海岸2-19-1

문의: www.enosui.com


에노시마 사무엘 코킹 가든江の島サムエル・コッキング苑

메이지 시대(1868~1912)에 영국인 무역상이었던 사무엘 코킹이 처음 조성한 식물원. 에노시마의 상징이자 전망 등대인 에노시마 시캔들江の島シーキャンドル도 정원 내에 위치한다. 겨울에는 일몰과 함께 시작되는 라이트업 행사도 볼 만하다.

주소: 神奈川県藤沢市江の島2-3-28 

문의: enoshima-seacandle.com



에노시마 신사江ノ島神社

바다를 수호하는 유서 깊은 신사로 세 명의 자매신을 모신다. 에노시마 입구에 있는 신궁인 헤쓰미야辺津宮와 계단 위에 있는 나카쓰미야中津宮, 그리고 이와야 동굴에 가는 길에 보이는 오쿠쓰미야奧津宮 등 산책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세 개의 신궁을 만나게 된다. 

주소: 神奈川県藤沢市江の島2-3-8

문의: enoshimajinja.or.jp


에노시마 이와야 동굴江の島岩屋

파도의 침식으로 생긴 천연 동굴로 에노시마 신사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동굴 구경도 흥미롭지만, 주변의 탁 트인 해안 절경이 황홀하다. 바위에 부딪히는 거친 파도를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절벽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저무는 노을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다.  

주소: 神奈川県藤沢市江の島2

문의: 0466-22-4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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