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에게는 자녀가 없다. 나는 엄마를 '엄마'라 부르며 말을 놓기도 하는데, 왜 엄마는 외할머니를 '어머니'라 부르며 깍듯하게 대하는지, 그리고 명절마다 모이는 큰집과 달리 외삼촌과 이모는 왜 외가댁에 잘 오지 않는지를 알게 된 건 퍽 나중의 일이었다. 엄마의 엄마는 엄마가 대학생 때 세상을 떠나셨고, 외할아버지는 쉰에 재혼하셨다. 내가 태어날 때 외할머니는 이미 한 분뿐이었지만, 엄마에게도 낳고 기른 엄마는 한 분뿐이었던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보통의 할아버지와는 조금 다르시다. 본인에 엄격한 만큼 남에 대한 기준도 높고, 절약정신이 투철하시다. 어린 시절, 무심코 외할아버지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나는 네 할아버지가 아니고, 외할아버지다. 똑바로 불러라’라며 호통을 치셨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사과를 깎으라고 하고는, 껍질이 너무 두껍다고 호되게 나무라셨다. 분명 다정한 순간도 많았을 텐데, 외가댁에 가면 행동거지 하나, 말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던 기억이 지배적이다. 한국에 살 때는 명절 때마다, 해외에 나가고 나서는 한국에 올 때마다 나를 외가댁에 데리고 갔던 엄마와 달리, 외삼촌이나 이모의 발걸음은 그리 잦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자주 친손주의 연락이 없다고 불평하셨는데,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외할아버지와 늦은 나이에 만나 반평생을 보낸 외할머니는, 반대로 정이 많고 씀씀이가 큰 편이셨다. 그래서 외할머니 하면, 외할아버지에게 혼나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슬프게도.
자녀가 없어서인지, 가끔 보는 유일한 외손녀인 나를 무척 반겨주셨다. 내 가슴께밖에 오지 않는 아담한 키에 복스러운 인상이었던 외할머니는, 키가 크고 마른 편인 나를 참 예뻐하셨다. 어린 내게 미스코리아에 나가라고 하는 사람은, 우리 가족 중 외할머니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대체로 객관적인 눈과 현실적인 화법을 지녔다).
무릎 수술을 여러 번 하셨다. 제법 큰 수술을 앞두고 외가댁을 방문했다 나가는 길, 나는 외할머니를 안아드리며 '수술 잘 될 거예요. 힘내세요'라고 말했다. 외할머니는 그 일이 무척 감동이었는지, 그 후 몇 십 년 동안 나를 볼 때마다 그 일을 회상하며 고마워하셨다. 사실 아빠가 시킨 것이라고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우즈베키스탄에 살던 중학생 시절이었을 것이다. 외가댁에 갔더니 외할아버지가 부재중이셨다. 외할머니는 내가 타슈켄트 어느 전통 시장에서 사서 신던 허름한 흰 구두를 보시고는 바로 백화점으로 데려가셨다. 겨우 10대 소녀에게 20만 원이 넘는 예쁜 분홍색 구두를 사주셨고, 직원에게 내가 신고 간 흰 구두는 버려달라고 하셨다. 근사한 한정식도 사주셨던 것 같다. 물론, 전부 외할아버지 몰래.
그렇게 나를 아끼셨는데도, 내 결혼식에는 오지 않으셨다. 무릎 탓을 하셨지만, 짐작건대 관계가 소원한 다른 친인척을 보는 게 껄끄러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일본에 가고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한국에서 찾아뵐 때마다 ‘예은이를 살아서 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다‘라고 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처음에는 같이 울먹이던 나도, 7년 내내 레퍼토리가 반복되자 더 자주 보고 싶다는 투정, 혹은 인사치레임을 깨닫고 웃으며 넘겼다. 그런데 작년 8월에 하신 말씀은 진담이 되었다. 외할머니는 올해 9월 초, 눈을 감으셨다.
신간 작업과 친구들의 방문으로 정신없던 시기였다. 9월 중순에 이미 귀국이 결정되어 있기도 했다. 다행히 오래 자리를 비워도 괜찮은 회사라 쓸 수 있는 휴가를 모조리 끌어모아 귀국 날짜를 앞당겼다. 이틀 동안 조문객을 맞이하고, 셋째 날 발인을 마쳤다. 손님이 많지 않았다. 운구할 때, 영정 사진은 젊은 사람이 들어야 한다는데 다른 후보가 없어 내가 들었다. 사진 속 외할머니는 내가 마지막으로 뵌 모습보다 훨씬 젊었다.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가 된 외할머니를 유골함에 담아 납골당으로 모시고, 생전 처음 보는 외할머니의 동생 분들과 고등어조림을 먹었다. 그분들의 얼굴은 나와 달리 외할머니를 꼭 닮아 있었다.
엄마는 상실에 익숙한 사람처럼 덤덤했다. 이미 20년 넘게 함께한 엄마를 잃어 봐서 덤덤한 것일까. 아니면 외할머니께서 위독하셨던 마지막 열흘간 정성껏 간호하며 마음의 준비를 마쳐서였을까. 사실상 상주나 다름없었던 역할이 너무나 과중해 슬픔을 느낄 새가 없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외할머니를 잃은 스트레스를 엄마에게 거칠게 쏟아내는 외할아버지 탓에 더 소모할 감정이 없었던 것일까.
나 역시 멀쩡했다. 마음이 어딘가 고장 난 사람처럼, 슬프지 않았다. 조문객을 한 차례 맞이하고 나서 한가해지면, 틈틈이 신간 원고와 레이아웃 컨펌도 했다. 친구들과 일정 조정을 위해 연락도 주고받았다. 그런 내가 약간 징그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난 뒤, 시어머니께서 추천해 주신 대구의 명소, 송해 공원을 걸었다. 옥연지는 넓었다. 물소리와 새소리가 들리는 산책로가 썩 괜찮았다. 외할머니도 이곳을 걸을 수 있었다면 좋아하셨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오랫동안 아픈 다리로 고생한 외할머니는 여기보다 좋은 풍경 속을 가뿐히 훨훨 날고 계시겠지. 그러자 갑자기 눈물이 떨어졌다. 아, 어떤 슬픔은 지속되는 상태가 아니라 산발적으로 찾아오기도 하는구나. 마음에 공간에 생겨야 비집고 들어오는 슬픔도 있음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느라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외할머니. 외할머니는 떠나셨는데, 저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서 죄송해요. 그곳의 시간은 여기와 다를 테니, 조금만 더 이기적으로 살다 머지않아 만나러 갈게요.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