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만 있는 ‘인공 자연’ 3곳
사람이 만든 자연도 자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적어도 싱가포르에서는 ‘캔(can)’*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싱가포르(721.5 km²)는 내 고향인 대구(883.5 km²)보다도 좁은 도시국가지만, 영토의 절반을 녹지가 차지한다. 생태계의 다양성도 발전된 도시 중에서는 유례없이 뛰어나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가든 시티(garden city)’라는 도시 개발 슬로건 아래 부단히 노력해온 결과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점은 자연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색을 덧입혀 재창조한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싱가포르에서 1년을 살며 처음으로 깨달았다. 공간이 협소하다면 정원을 수직으로 짓고, 폭포가 없다면 실내에 만들면 그만이라는 것을. 그리고 오롯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자연은 본래의 형태보다 더 편리하고, 쾌적하며,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 캔(can)’은 싱가포르인들이 ‘가능하다’라는 뜻으로 자주 쓰는 표현이다. ‘캔 캔(can can)’ 또는 ‘캔 라(can lah)’라고도 한다.
만약 싱가포르에서 단 한 군데만 방문할 수 있다면, 가든스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를 권하고 싶다. 2012년, 총 101ha 면적의 매립지에 세워진 이곳은 전면 유리 패널로 둘러싸인 3 군데의 실내 정원과 영화 아바타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한 슈퍼트리 그로브 & OCBC 스카이웨이(Supertree Grove & OCBC Skyway), 그리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야외 정원으로 나뉜다.
가든스 더 베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시설은 클라우드 포레스트(Cloud Forest)였다. 들어서는 순간 35m 높이의 인공 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가 청각을 사로잡고, 고개를 다 젖혀야 그 끝이 보일 정도로 장엄한 풍경이 시각을 압도한다. 맨 꼭대기에 있는 로스트 월드(Lost World)에는 해발 2000m 고지대 식물이 살고, 공중에 설치된 클라우드 워크(Cloud Walk)를 걸을 때는 구름 대신 미스트가 뿜어져 나온다. 이 산은 사실 인위적인 건축물에 불과하지만, 꽃과 풀로 뒤덮여 있어서인지 자연을 트래킹 하는 듯 상쾌하다. 물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말이다.
싱가포르의 계절이 축축한 여름(우기)과 쨍한 여름(건기) 두 가지로 나뉜다면, 플라워 돔(Flower Dome)은 언제나 꽃피는 봄이다. 식물이 살기 좋은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므로 적도 부근에서도 일본의 벚꽃과 네덜란드의 튤립, 중국의 달리아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싱가포르 본래 기후나 지형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일을 과학의 힘으로 실현한 것이다. 사시사철 푸르기만 한 싱가포르에서 다채로운 풍경에 대한 갈증을 해갈해주는 고마운 장소다.
지난 2019년 4월에 오픈한 플로럴 판타지(Floral Fantasy) 역시 꽃을 주제로 한다. 실내 정원은 150종이 넘는 식물의 보금자리인데, 특히 천장에 매달린 파스텔 톤의 플라워 태피스트리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세 군데의 실내 정원 중 규모가 가장 작지만, 예약 없이 들어가기 어려운 최고의 핫플레이스다.
가든스 바이 더 베이에서의 하루는 늘 슈퍼트리 그로브에서 마무리하곤 했다. 야외 정원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총 18채의 슈퍼트리는 700여 종의 희귀 식물 서식지이며, 가장 높은 것은 16층짜리 빌딩과 맞먹는다. 비록 콘크리트와 철로 이루어져 있지만, 살아있는 생물처럼 태양열을 흡수해서 에너지로 쓰고, 물을 순환시키며, 뜨거운 공기를 배출한다. 햇빛과 물을 마시고, 공기를 정화시키는 실제 나무의 역할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낮에는 캐노피를 통해 그늘을 제공하고, 매일 7시 45분과 8시 45분에 야간 조명 쇼를 선보여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도 인공 나무의 몫이다.
처음 센토사 섬(Sentosa Island)의 해변을 걸었을 때, 신기할 정도로 희고 고운 모래와 정갈하게 가꿔진 야자수, 그리고 수영장처럼 얕고 잔잔한 바닷물에 경이를 넘어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실로소 비치(Siloso Beach)와 팔라완 비치(Palawan Beach), 그리고 탄종 비치(Tanjong Beach)가 모두 계획적으로 조성된 인공 해변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의문이 해소된 기분이었다.
센토사의 해변은 다양한 액티비티를 효율적으로 즐길 수 있는 하나의 테마 파크와도 같다. 실로소 비치의 짚라인을 타고 내려오면 바다를 가로질러 작은 인공 섬에 안착한다. 다시 해변으로 돌아와 ‘아시아의 최남단’이라는 팔라완 비치로 이동하면, 또 한 번 인공 섬으로 이어지는 흔들 다리가 반긴다. 섬에 설치된 전망대에 오르면 망망대해를 바쁘게 오가는 화물선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탄종 비치. 세 군데 중에서 가장 고요한 낮의 풍경과, 가장 세련된 밤의 풍경을 보유하고 있다. 각각의 해변은 무료 셔틀버스로도 오갈 수 있으며, 이 외에도 번지점프와 루지 등 수많은 어트랙션이 바닷가를 수놓는다.
지난 2019년 4월, 창이 국제공항에 새롭게 오픈한 복합 문화 시설 주얼 창이(Jewel Changi)는 클라우드 포레스트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실내 폭포’ 타이틀을 거머쥔 HSBC 레인 보텍스(Rain Vortex)로 관심을 모았다.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움푹 파인 천장에서 원통형으로 쏟아지는 40m 높이의 폭포는 대자연 이상의 감동을 선사한다. 여기에 그 주변을 싱그러운 나무로 풍성하게 에워싸는 시세이도 포레스트 밸리(Shiseido Forest Valley)가 실내외의 경계를 더욱 모호하게 만든다.
해가 진 뒤에는 빛의 잔치가 시작된다. 시세이도 포레스트 밸리는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나무의 색이 변하는 인터렉티브 미디어 아트가 된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예술가 집단인 팀랩(teamLab)의 작품이다. 저녁 7시 30분부터 새벽 12시 30분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선보이는 레이저쇼도 볼 만하다. 자연이라는 소재에 인간의 창의력과 재치를 더했을 때, 얼마나 환상적인 결과가 얻어지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번 글을 쓰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자연과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진정한 자연의 일부라면, ‘인공 자연’이라는 생경한 개념도 결국 자연의 섭리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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