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동안 먹은 로컬 푸드 베스트 10
싱가포르 음식 중 대부분은 싱가포르’만’의 것이 아니다. 가장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은 국가는 중국과 말레이시아지만, 20여 년간 식민 지배를 펼쳤던 영국과 인접 국가인 인도네시아, 일찍부터 이주민을 보낸 인도 등 꽤 다양한 국가와 교집합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 국가를 이룬 것은 겨우 1965년의 일. 50년이라는 시간은 새로운 전통을 만들기에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싱가포르의 미식 세계는 깊다. 국가는 젊을지언정 그 땅에서의 삶은 적어도 13세기 때부터 이어져 왔으니. 또한, 어느덧 동남아시아의 최부국이자 관광 대국으로 거듭난 싱가포르는 자체적인 문화를 치열하게 개발하고 홍보하는 중이다(그 예로 2019년 3월, 야외 푸드코트 문화인 호커센터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록을 신청했다).
싱가포르에서 지내는 1년 동안, 나는 이토록 넓고 깊은 현지 미식 문화에 발만 살짝 담그고 왔을 뿐이다. 그렇지만, 2박 3일 또는 3박 4일에 한정된 여행자의 경험보다는 깊을 터. ‘싱가포르에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동남아시아 국가라고는 태국과 하노이, 인도네시아의 도시 한두 군데밖에 가보지 못한 나는 주변 문화권으로부터 ‘싱가포르 오리지널’을 정확히 변별해 낼 능력이 없다. 그래서 단순히 현지인들이 많이 먹는 듯한 음식, 그리고 쉽게 찾을 수 있었던 음식을 주로 포함시켰다. '전통 음식'이 아니라 '현지 음식' 또는 '로컬 푸드'라는 표현을 쓴 이유도 그래서다.
더불어 순위는 개인적인 선호도일 뿐이니 가볍게 봐주기를 바란다. 참고로 나는 고기보다는 해산물과 야채를(고기 중에서는 붉은 고기보다 가금류를), 밥보다는 빵이나 국수를, 그리고 식사보다는 안주 요리를 좋아하는 입맛을 가졌다.
그릇을 보자마자 갈비탕이 떠올랐다. 한 숟가락 뜨고 나니, 그야말로 마늘과 후추향이 진한 갈비탕이었다(물론 당면은 없다).
싱가포르인의 든든한 아침 식사로 널리 사랑받고 있는 바쿠테는 돼지갈비를 각종 향신료와 함께 뼈 채 고아 만든 국물 요리다. 말레이시아와 지금의 싱가포르에 정착한 중국 북건성 출신 이주자들이 저렴하게 먹던 보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싱가포르에서 바쿠테로 가장 유명한 체인점은 1969년 길거리 음식점에서 출발한 송파(Song Fa). 개인적으로는 빨간 칠리소스에 고기를 찍어먹는 게 좋았고, 고기가 먹고 싶지 않은 날은 생선 토핑도 괜찮았다.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했지만, 돼지 내장만 올린 바쿠테도 있다. 혹시라도 먹어본 한국인이 있다면 어땠는지 물어보고 싶다.
딤섬 하면 당연히 중국 광둥 지역과 홍콩이 오리지널이다. 그 정통성에 도전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싱가포르로 넘어와 조금 변형된 딤섬의 맛도 나쁘지 않았다.
싱가포르에서 맛본 퓨전 딤섬의 순한 맛은 파라다이스 다이너스티(Paradise Dynasty)의 팔색 소룡포. 여덟 가지 맛 중 가장 선호하는 것은 블랙 트러플과 푸아 그라. 남에게 순순히 양보하는 것은 빨간색 스촨 맛이다.
한편, 찹수이 카페 뎀시(Chopsuey Cafe Dempsey)의 딤섬 세트처럼 비주얼이 화려한 고급 딤섬도 있다. 찹수이는 싱가포르 브런치 맛집으로 유명한 PS. CAFÉ 와 같은 계열. 인테리어는 비슷하지만 아시아 요리에 특화한 레스토랑이다.
호키엔 지역어를 쓰는 중국 후지안성 출신 이주자로부터 비롯된 볶음 국수다. 한국인 여행객 사이에서는 덜 알려진 편이지만, 호커 센터에서 빠지지 않는 메뉴. 에그 누들과 쌀국수를 섞어 쓰고, 토핑으로는 주로 새우와 돼지고기가 올라가며, 삼삼한 맛은 매콤한 삼발 칠리소스로 보충한다.
내가 호키엔미를 먹은 곳은 올드 말라야 카페(Old Malaya Café). 호키엔미 외에도 전병과 비슷한 요리인 포피아(Popiah)도 추천하고 싶다.
호키엔미와 유래도 재료도 비슷하지만, 중국 당면처럼 폭이 넓은 면을 쓰고 간장 소스를 진하게 입힌다. 같은 이유로 내가 더 선호하는 요리이기도 하다. 맛을 설명하자면 자장면과 팟타이 사이 어디쯤이랄까.
센토사 모노레일을 타기 전, 비보시티에 있는 푸드 리퍼블릭에서 처음 맛본 이후, 호커 센터에서 가장 자주 찾는 국수 요리로 등극했다.
동남아에서 흔히 먹는 꼬치 요리인 사테는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작게 썬 고기를 향신료에 재운 뒤 꼬치에 끼워 숯불에 굽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데, 소스가 중요하다. 간장이나 고추장을 바르는 우리나라와 달리, 사테는 고소하고 달콤한 땅콩 소스가 정석이다. 주로 오이와 양파 같은 상큼한 야채가 함께 나와 고기의 느끼함을 상쇄시켜준다(물론 맥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싱가포르 대표 관광 명소이기도 한 라우파삿 사테거리(Lau Pa Sat Satay Street)는 아쉽게도 가보지 못했다. 대신, 마칸수트라 글루턴스 베이(Makansutra Glutton's Bay) 있는 사테집을 즐겨 찾았다. 특히, 닭고기와 새우, 양고기 사테가 내 입맛에 맞았다.
당근을 싫어하기에 이름만 듣고 기피했는데, 알고 보니 당근은 한 톨도 들어가지 않는 무 떡 볶음이었다. 게다가 맛도 있었다.
무 요리에 당근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요리를 만든 사람들의 언어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 조주성에서 사용하는 테오추 지역어에서는 당근과 무의 개념이 비슷해, 무를 ‘흰 당근’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둘은 맛이나 색깔이 달라서 그렇지, 모양은 제법 비슷하다.
캐럿케이크는 무 특유의 삼삼하고 시원한 향과 간장의 감칠맛이 잘 어우러져 맥주 안주로 즐겨 먹었다. 사진은 크리스탈 제이드(Crystal Jade)에서 배달한 캐럿 케이크. 주사위 모양으로 잘려 있어 한 입에 넣기 편했다.
우리나라에서 ‘치킨’하면 온 국민이 닭튀김을 떠올리듯, 싱가포르 사람들은 닭고기 덮밥인 치킨라이스를 떠올린다. 보통 메뉴 앞에 ‘하이난식(Hainanese)’이라는 말 덧붙이는데, 중국 하이난성 출신 이주자들이 조리법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단, 붉은 칠리소스를 더하고 닭고기의 연한 부위를 사용하는 것은 광동 요리의 영향이라고 한다.
호커센터나 쇼핑몰 지하상가, 그리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치킨라이스를 먹으며, 어쩌면 이 요리의 핵심은 닭고기보다는 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닭을 부드럽게 조리하는 것만큼이나, 치킨 스톡과 생강, 판단 잎 등을 이용해 밥을 고소하게 짓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지만, 저렴한 브랜드 중에서는 1979년 싱가포르 차이나타운에서 시작한 분통키(Boon Tong Kee)를 추천. 입에서 녹는 듯한 야들야들한 식감이 놀라웠다.
싱가포르에서는 맥 모닝보다 카야 토스트다. 얇게 밀어 바삭바삭하게 구운 빵에 코코넛 밀크, 달걀, 설탕, 판단 잎 등이 들어간 카야 잼을 듬뿍 바르고, 버터로 고소함을 더한다. 수란에 간장과 후추를 살짝 뿌려 소스를 만들고, 여기에 진한 현지식 커피(kopi)나 밀크티(teh)를 곁들이면 완벽한 한 상. 역시 중국 하이난성 출신 이주자들로부터 유래했다.
카야토스트를 파는 가게는 무수히 많다. 1944년에 시작된 야쿤 카야토스트(Yakun Kaya Toast)를 비롯해 토스트 박스(Toast Box), 헤븐리 왕(Heavenly Wang), 킬리니 코피티암(Killiney Kopitiam) 등 어디에서나 체인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관광객이 적은 가게 중에서는 케옹섹 로드의 통아 이팅 하우스(Tong Ah Eating House)도 만족스러웠다.
싱가포르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칠리 크랩. 1956년에 싱가포르에서 이동식 식당을 운영하던 처 얌 티안(Cher Yam Tian) 식당 주인이 처음 발명했고, 이후 삼발 소스와 달걀 등을 가미하는 등 약간의 수정을 거쳐 오늘날의 조리법이 탄생했다.
뻔한 음식인 데다가 가격도 비싸지만, 한국에서 손님이 올 때마다 먹다 보니 어느새 중독되어 버렸다. 주로 이용한 곳은 이스트코스트 파크에 있는 롱비치 시푸드 레스토랑(Long Beach Seafood Restaurant). 바로 옆에는 점보 시푸드 레스토랑(Jumbo Seafood Restaurant)도 있다.
바다가 보이는 야외석에서 앉아 칠리 크랩과 튀긴 빵인 만토우(Mantou), 공심채 볶음(Sambal Kang Kong), 시리얼 새우(Cereal Prawn) 등을 푸짐하게 차려 놓고, 반가운 사람과 맥주를 마시는 행복을 무엇에 비할까.
최근에는 블랙 페퍼 크랩과 버터 크랩, 커피 크랩 등 다양한 버전이 끊임없이 탄생하며 열풍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인 입맛에도 익숙한 칠리크랩과 달리, 락사는 동남아 음식 좀 먹어 봤다는 사람도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국수 요리다.
흔히 ‘페라나칸(Peranakan)’이라고 불리는 중국과 동남아 혼합 음식이며, 그중에서도 카통 락사는 싱가포르 카통 지역에서 발전한 락사의 한 종류이다. 쌀국수는 짧게 썰어 숟가락으로 떠먹을 수 있으며, 걸쭉한 국물에서는 해산물과 커리, 그리고 코코넛 밀크의 향이 느껴진다. 토핑은 일반적으로 삶은 달걀과 새우, 조개, 숙주, 유부 등이 올라간다.
요즘은 로브스터 한 마리를 통째로 올리는 등 고급 락사도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진한 국물은 328 카통 락사(328 Katong Laksa)만 못했다.
누군가 그랬다. 야외에서 먹으면 무엇이든 더 맛있다고. 싱가포르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일찍부터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꼽은 10가지 요리 역시 대부분 현지인들이 야외석이나 호커 센터에서 즐겨 먹는 요리다. 물론 소개한 레스토랑 중에서는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깔끔한 실내 음식점도 많지만, 이왕이면 야외 식사 문화에 도전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30도가 넘는 무더위에서도 선풍기 바람에만 의존한 채 밥 먹는 즐거움을 알게 된다면, 싱가포르 생활과 여행이 완전히 달라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