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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은 Aug 30. 2019

홍콩 유학생의 고백

떠난 후에야, 그곳을 사랑하게 됐다

홍콩의 레트로한 정취를 알기에 너무 어렸던 스무 살의 나는, 도시의 화려한 단면만 보고 열등감을 느끼기 일쑤였다. 관광객이 전리품처럼 구매하는 명품 가방이나 5성급 호텔에서 즐기는 애프터눈 티, 혹은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유학생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사치였고, 서민층을 위한 먹거리와 주거 공간은 가격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어디 그뿐이랴. 식당 입구에 목이 꺾인 오리의 사체가 적나라하게 진열된 모습은 입맛을 떨어뜨리기 충분했으며, 기숙사 식당에서 나오는 요리도 한결 같이 기름지거나 꼬릿한 향이 났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화장실. 많은 사람들이 좌변기에 앉는 것을 불결하게 여기는 탓에, 발을 밟고 올라가거나 스쿼트 자세로 볼일을 본다. 처음 화장실 문을 열고 그 처참한 흔적을 봤을 때의 충격이란.

여기에 다른 개인적인 사정도 겹쳐 좀처럼 홍콩에 정을 붙이지 못한 나는 방학이 되면 돈을 벌거나 인턴 경험을 쌓는다는 명목으로 도시를 도망치듯 빠져나오곤 했다. 대학교 2학년 때는 기숙사비와 항공표까지 제공해주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합격해 한 학기를 도쿄에서 보냈다. 운 좋게 홍콩 대학교 석박사 과정에 붙었지만, 한국으로 돌아와 취업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도 그 좁은 도시에서 20대 전부를 보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귀국 후에 있었던 졸업식에는, 당연히 불참했다.


Photo by Banter Snaps on Unsplash


홍콩을 다시 좋아하게 된 것은 대학 졸업 후 3년 뒤였다. 직장생활의 고단함은 진저리 나던 대학시절의 기억을 미화하기 충분했고, 무엇보다 사람이 그리웠다. 재정 형편이 한결 여유로워진 나는 홍콩에 남아 있는 지인을 불러 루프탑 바에서 야경을 보며 칵테일을 마시고, 호텔 방에서 대학 시절 친구들과 파티를 벌였다. 다음 날에는 '해장'을 명목으로 딤섬집을 방문해 종류별로 주문했다. 일종의 '한풀이' 일정을 마친 나는 마지막으로 20대 초반의 방황과 설렘, 추억이 밴 도시 곳곳을 혼자 탐색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이었기에 '낡고, 습하고, 투박하게'만 보이던 풍경이 잠시 머물다 갈 여행자의 시선에서는  '복고스럽고, 운치 있고, 정겹게'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여전히 그곳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꿈을 꾸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그 후로 뜻밖의 '홍콩 앓이'에 빠진 나는 1년에 두어 번씩 홍콩을 찾아 반가운 얼굴과 거리를 만끽했고, 대학생 때 외면하던 완탄면과 덮밥은 없어서 못 먹는 지경이 됐다. 그리고 2014년 우산 시위를 비롯한 분쟁이 있을 때마다 애정 어린 마음으로 지켜보게 됐다.


Photo by Airam Dato on Unsplash


많은 이들이 홍콩이 살기 힘든 도시라고 한다. 실제로 빈부격차는 홍콩의 고질적인 문제였고, 1997년 중국 반환 당시 도시 경제를 떠받치던 중산층 2만 4천여 명이 이민을 떠난 것도 타격이 컸다. 게다가 비록 영국의 식민 지배 아래이긴 했지만, 약 150년간 민주주의를 누려온 홍콩 시민들이 사회주의 정부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것은 당연한 일. 점차 중국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홍콩 사람들의 불만과 불안은 나날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홍콩이 '특별행정구'이긴 하나, 객관적으로 중국의 영토임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삶의 여러 가치 중에서 자유를 높은 순위에 두는 나는 홍콩에 남아 더 나은 삶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시민의 편에 서고 싶다. 비록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지언정, 저항은 더 나은 미래를 쟁취할 최소한의 조건이자 세계인의 기억 속에 똑똑히 각인될 홍콩의 정신이므로. 철없고 미숙하던 나를 품어주었던 그 도시를 하루 빨리 기쁜 마음으로 다시 찾을 날을 고대한다.


 Photo by Yasuhiro Yokota and Airam Dat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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