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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은 Oct 18. 2019

도시라는 이름의 병

‘도시’라는 병이 있는 것 같다.


스스로 선택한 적 없는 경쟁에 내몰리는 병, 잠시라도 멈추어 있으면 조급해지는 병, 소비가 아니고선 내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병, 필요한 물건이나 정보가 있으면 그때그때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병, 그리고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더욱 심화하는 병….


도시는 내 운명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아파트 단지 놀이터와 어두컴컴한 오락실에서 추억을 쌓았고, 학창 시절은 학교와 학원이 전부였다. 이십 대에는 홍콩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로 돌아와 취업에 성공했지만, 이내 가벼운 우울증이 찾아왔다. 무작정 도쿄로 떠나 대학원을 다니고 이직을 하자 어느새 서른. 동아시아의 손꼽히는 대도시들에서 숨 가쁘게 보낸 청춘이었다.


(좌) 홍콩 / Photo by Florian Wehde on Unsplash  (우) 도쿄 / Photo by Erik Eastman on Unsplash


그렇게 30대가 되자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십 대 때부터 마음을 잠식해 왔던 외로움과 불안의 원인이. 도시에는 정서적인 여유가 없었다. 무의미해 보이는 등수 싸움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교묘해질 뿐이었다. 도시가 거대할수록 그곳에 소속된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감은 희미해지고, 경쟁은 치열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물질을 통해 스스로를 과시하고, 도태되지 않으려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사는지도 모르겠다.


움직이는 교통수단이나 높은 건물 안이 아닌, 그저 땅을 딛고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하루에 얼마나 될까. 철근과 콘크리트에 갇혀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온종일 들여다보는 삶이 과연 정상인 걸까. 그런 회의감이 내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면 소도시로 여행을 떠났다. 최소한의 교통과 숙박, 편의 시설만 갖춰진 시골 마을에서는 특별한 무엇을 하지 않아도 위로가 됐다.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느긋하게 며칠을 쉬다 보면 도쿄로 돌아갈 힘이 생겼다. 그리고 매번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곳에서 딱 한 달만 살아 볼 수 있다면!’


그 바람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 2018년 여름이었다. 마침 남편의 해외 발령으로 남편과 함께 1년간 도쿄를 떠나게 되었고 회사도 그만두어야 했다. 이참에 한 달 일찍 직장을 정리하고 남은 기간을 한적한 일본 소도시에서 보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선택한 장소는 일본 남서쪽 시코쿠(四国) 지방에 자리한 항구 도시 다카마쓰(高松).


다카마쓰는 일본 43개 현(県) 중 가장 작은 가가와(香川)현의 현청(県庁) (‘현’은 우리나라의 ‘도’에, 현청은 도청쯤에 해당한다) 소재지다. 또한, 가가와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 도시이자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언젠가 일본의 모든 현에 가보는 것이 꿈인 나는 다카마쓰에서 한 달을 지내며 다카마쓰를 비롯한 가가와현의 여러 도시와 마을을 여행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가장 작은 현이니, 한 달이면 전부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기대감 때문에 이 지역을 선택했다.


가가와현의 북동쪽에는 3,000여 개의 섬을 품은, 일본의 지중해라 불리는 세토내해(瀬戸内海)가 자리 잡고 있고, 남쪽에는 드넓은 사누키 산맥이 펼쳐진다. 산과 바다 사이에 자리한 지리적 조건과 일 년 내내 화창한 날씨 덕분에 해산물은 물론 과일과 채소도 풍부하고, 다른 지역에 비해 개발이 늦어진 탓에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다. ‘우동현’이라고 불릴 만큼 수두룩한 우동집과 기업가 후쿠타케 소이치로를 필두로 한 아트 프로젝트도 가가와현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그러니까 천혜의 자연과 특색 있는 미식, 예술이 조화롭게 생동하는 작지만 옹골진 지역인 셈이다.

(좌) Angel Road (우) Nakayama Senmaida / www.my-kagawa.jp/en/photo


나는 다카마쓰에 작은 원룸을 구하고, 오랫동안 꿈꾸던 소도시의 로망을 실천에 옮겼다. 낮에는 바닷가와 산골 마을을 유유자적 산책하며 그림 같은 풍경과 그 속에 있는 예술 작품을 실컷 감상했다. 오후에는 커피 향 진하게 풍기는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배가 고프면 어디에나 있는 셀프 우동집에서 우동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저녁에는 여유로운 해변 공원에서 하염없이 노을을 보고, 해가 지면 왁자지껄한 선술집 혹은 숙소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돌아보니 그곳에서 먹고, 보고, 걸었던 행위 하나하나가 내게는 최고의 치유였다.


직항 항공편으로 인천에서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다카마쓰는 대도시의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이국적인 정취까지 즐길 수 있는 최고의 피난처다. 이 책은 도시라는 병에 시달리는 현대인이 다카마쓰에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테라피를 담는다. 지역 문화가 집약된 미식(美食)으로 몸과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푸드 테라피’, 자유로운 예술혼이 담긴 작품을 만나며 감성을 채우는 ‘아트 테라피’, 그리고 자연을 벗 삼아 하염없이 걸으며 내면을 정돈하는 ‘워킹 테라피’까지. 정형화된 관광 코스를 쓱 돌고 끝내기보다, 낯선 장소가 주는 신선한 자극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길 바라는 의미에서 ‘테라피’라는 단어를 썼다. 다만, 의학적으로 인정받은 치료법은 아니니, 어디론가 떠나기 힘들 정도로 아프다면 망설이지 말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길 바란다.


다카마쓰성  앞에 있는 줄리안 오피의 작품 @fromlyen




※ 세나북스 단행본 『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의 미리 보기 연재이며, 일부 글과 사진은 추가 또는 수정되었습니다. 출간된 도서는 총 21편의 에세이 및 여행 정보, 이용 팁, 추천 코스 등을 포함합니다. 가까운 오프라인 및 온라인 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네이버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406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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