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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은 Oct 23. 2019

지상보다 아름다운 땅속 미술관

나오시마 지추 미술관 地中美術館


Part 2 아트 테라피: 소도시에 꽃핀 예술 


미(美)의 추구는 본능이다. 예술가는 내면의 환희, 고통, 사랑, 절망을 타고난 재능과 단련된 기교를 활용해 독창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 가가와현에서 만난 그림과 조각, 문학, 건축에는 미적 가치뿐 아니라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는 작가의 따스함이 배어 있었다. 그 대상은 지역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먼 곳에서 온 외지인, 혹은 작가 자신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작품은 하나같이 으스대는 기색 없이 관람객이 마음껏 체험하고 사유해주기를 기다린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괜찮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한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벽에 추상화를 그리고, 상상 속 친구와 즉흥 연극을 즐기며, 자연에 대한 호기심으로 넘쳐났던 작은 아티스트였으니까. 그때의 순수한 감성으로 자유롭게 해석하고 사유하며, 예술이 선사하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보자.




지상보다 아름다운 땅속 미술관

나오시마 지추 미술관 地中美術館


외모나 학력, 연봉으로 사람을 재단하는 도시에서는 과시욕이 싹트기 쉽다. 서울과 도쿄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 종종 분에 넘치는 브랜드를 쓰고 비싼 음식을 먹은 것은 주변 사람보다 모자람을 견디지 못하는 열등감 탓이었다. 내면의 불안을 화려한 치장으로 감추려 했던 것이다. 


Photo by STIL on Unsplash


그러나 다카마쓰에서 한 달을 지내는 동안에는 고작 대여섯 벌의 옷을 매일 빨아 가며 입어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노면전차와 페리를 타고 시골 마을을 여행하는 데 고급스러운 시폰 원피스나 명품 가방은 거추장스럽기만 하니까. 게다가 손에 쥔 것보다 내면의 풍요가 중요함을 아는 주민들 앞에서 도시의 허울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법이다.


일본의 교육 기업 베네세 홀딩스의 후쿠타케 소이치로 회장 역시 도쿄에서 살다가 가가와현에서 전철로 한 시간 거리인 소도시 오카야마로 이주한 경험이 있다. 선대 회장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본사로 일터를 옮긴 것이다. 그리고 『예술의 섬 나오시마』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오카야마에서 몇 달을 보내며 세토내해의 섬들을 돌아보는 사이 도쿄에선 느낄 수 없었던 행복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도쿄에는 자극, 흥분, 긴장, 경쟁, 정보, 오락이 있을 뿐 거기에 ‘인간’이라는 단어는 없다.



(좌) 국민일보에 실린 후쿠타케 소이치로 회장 사진  (우) Photo by Masaaki Komori on Unsplash


도시를 지배하는 경제 논리에 맞서 인간미 넘치는 삶을 지키고 싶었던 후쿠타케 회장은 ‘나오시마 아트 프로젝트’라는 기적 같은 발상을 실현한다. 1917년부터 구리 제련소로 사용되던 나오시마는 원래 환경오염이 심각해 주민조차 하나둘 떠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1986년, 후쿠타케 회장이 어린이를 위한 국제 캠프장을 열고,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실행하며 섬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본래의 자연을 재생시키고, 그곳에 현대 미술을 접목해 섬 공동체가 더 나은 삶을 영위하게 만든 것이다. 1992년에는 호텔이자 미술관인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이 문을 열고, 뒤이어 1997년에는 오래된 민가를 설치 작품으로 탈바꿈하는 ‘이에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이윽고 2004년, 인기가 너무 많아 사전 예약제로 변경될 수밖에 없었던 지추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좌) 지추미술관 전경  benesse-artsite.jp/en/art/chichu.html (우) 지추미술관 정원 @fromlyen

지추 미술관은 지중(地中)을 뜻하는 이름처럼 땅속에 내려앉아 있다. 조용히 외부 지형에 순응하며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는다. 미술관 입구에서 지하 3층 전시실까지 뚜벅뚜벅 걸어 내려갈 때도 땅 밑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콘크리트 벽 사이사이를 풍성하게 채우는 빛, 그리고 하늘을 향해 열린 안뜰이 지상에 있는 듯한 개방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나는 작품을 감상하기도 전에 이처럼 독특한 구조와 군더더기 없는 건축미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지추미술관 내부 benesse-artsite.jp/en/art/chichu.html


미로 같은 미술관 통로에서 한참 헤매다 가장 먼저 맞닥뜨린 작품은 지하 2층에 있는 인상주의 거장 클로드 모네(1840~1926)의 수련 연작이었다. 신발을 벗은 채 온화한 햇살이 비치는 순백의 공간을 걸었다. 가로 6m, 세로 2m인 <수련 연못(1915~1926)> 이 자연광에 시시각각 다른 색깔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백내장을 앓던 모네의 눈에 비쳤을 어슴푸레한 빛과 아련한 형체의 파노라마가 눈앞에 펼쳐졌다. 한 세기 전에 칠한 붉고, 푸르고, 창백한 물감이 잔잔하지만 찬란하게 반짝였다. 거칠거칠한 유화의 질감 속에 살아 있는 빛은 애잔함, 불안감, 슬픔 따위의 감정을 자극했다. 눈을 돌리니, 조금 더 작은 크기의 수련 그림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모네의 작품만을 위해 탄생한 새하얀 방을 나왔을 때, 마음속 어딘가가 물감처럼 뒤엉킨 기분이었다. 


클라우드 모네 수련 연작 일부 benesse-artsite.jp/en/art/chichu.html


같은 층에 있는 제임스 터렐(1943~) 역시 나의 감각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빛을 이용한 설치 미술로 유명한 터렐은 지추 미술관에 세 점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오픈 필드>다. 작품은 벽에 걸린 푸르스름한 스크린 같지만, 계단을 올라 그 안으로 들어가면 입체적이고 몽환적인 방이 나온다. 방에 들어가자 건너편에는 또 다른 스크린이 보였다. 그곳을 향해 걷다가 일정한 거리에 다다르면 멈춰야 하는데, 관람객 중 한 명이 너무 가까이 다가갔는지 요란한 경고음이 울렸다. 연보랏빛이 은은하게 감싸는 공간은 마치 안개가 드리운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방금 걸어온 길이 평평한지 내리막길이었는지도 모호하다.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차가운 감촉을 제외하고 어떤 감각도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공간. 뒤틀린 인식과 빛의 무한한 팽창을 경험하는 곳이었다. 사후 세계가 있다면 분명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제임스 터렐 <오픈 필드> benesse-artsite.jp/en/art/chichu.html


지추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세 번째 작가는 월터 드 마리아(1935~2013)다. 작품의 수는 하나뿐이지만, 공간은 가장 넓다. 그리고 실체가 분명하다. <시간/영원/시간 없음>이라는 공간에 들어서면, 마치 신전과 같은 계단이 펼쳐진다. 계단 중간쯤에는 지름 2.2m의 검은 화강암이 있다. 반들반들한 암흑 덩어리는 시간을 왜곡하는 블랙홀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멈춰진 시계추 같기도 하다. 양옆과 입구 벽면에는 금박을 입힌 각진 기둥이 지키고 있으며, 위에서는 날카로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어 웅장함을 더한다. 시간을 주제로 한 작품 이름처럼 해의 움직임에 따라 음영의 위치가 바뀌며 공간을 지휘한다. 지구 상에 모든 생명이 사라진다고 해도 오로지 시간은 끊임없이 흐를 것이다. 손으로 만지거나 눈으로 볼 수도 없지만, 누구나 의식하고 있는 시간의 존재는 그래서 ‘영원’이기도 하고, ‘없음’이기도 한가보다. 


월터 드 마리아 <시간/영원/시간 없음>  benesse-artsite.jp/en/art/chichu.html


관람을 마친 뒤 카페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머리를 식혔다. 일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경험이었기에 현실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추 미술관은 자신의 경험과 감각으로 체험하는 작품인 만큼 정해진 해석이 없다. 그래서 작품을 본 감상을 나누며 비교할 대상이 없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아쉬웠다. 그리고 이토록 아름다운 경험을 선물해 준 한 기업가의 모험심에 감사했다. 


후쿠타케 회장은 자신이 소유한 미술품과 자본을 아낌없이 투자함으로써 오랫동안 버려졌던 섬을 전 세계 여행자가 몰려드는 기적의 섬으로 거듭나게 했다. 나오시마 주민들에게 당당한 미소를 되찾아 주었고, 등을 돌렸던 젊은 사람들이 돌아오게 했다. 기업이 공동체에 투자해야 한다는, 일명 ‘공익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그의 철학은 지상에서 가장 품격 있는 과시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다른 말일지도 모르겠다. 


Photo by Thijs Slootjes on Unsplash




※ 세나북스 단행본 『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의 미리 보기 연재입니다. 본 포스팅에는 책에 싣지 못한 사진이 추가되었습니다. 출간된 도서는 총 21편의 에세이와 여행 정보, 이용 팁, 추천 코스 등을 포함하며, 서점 또는 인터넷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네이버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406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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