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시마 데시마 미술관 豊島美術館
나는 여행의 즉흥성을 사랑한다. 촘촘하게 짠 계획을 보란 듯이 헝클어뜨리는 변수와 늘 우연을 가장하고 나타나는 선물 같은 발견처럼, 내 예상을 무너뜨리는 놀라움과 환희를 마주할 때 비로소 여행이 여행다워진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가끔은 낯선 도시에서 무엇을 할지 계획하기보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하루를 채우도록 내버려 둔다.
이를테면, 다카마쓰의 오래된 카페에서 아침을 먹다 문득 데시마 미술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페리 시간표를 검색해 보는 일, 그리고 30분 후 떠나는 배를 타기 위해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고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 항구로 향하는 일 같은 것이다.
다카마쓰항에서 출발을 준비하고 있던 고속 페리에 겨우 올라 35분 만에 데시마 이에우라항에 도착했다. 아트 프로젝트의 본거지 나오시마에 비해 한결 호젓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굽이진 언덕과 계단식 논이 있고 고개를 돌리면 그 자리에 있는 세토내해의 잔잔함도 색다른 운치를 자아냈다.
풍요로운 섬이라는 뜻인 데시마(豊島) 한 가운데에는 단야마라고 불리는 해발 330m의 산이 솟아있다. 비가 내리면 이곳에 물이 고였다가 마을로 흘러내리는데, ‘데시마돌(豊島石)’이라고 불리는 부드러운 응회암과 단단한 안산암이 물을 정화해준다. 덕분에 농사지을 물이 풍부해 세토내해 섬 중에서는 드물게 오래전부터 벼농사를 지어 왔으며, 낙농업도 발달했다. 그뿐만 아니라 유자와 딸기를 비롯한 과일, 바다에서 자라는 해산물까지 풍부해 이름 그대로 사람 살기 좋은 비옥한 섬인 셈이다.
이토록 축복받은 섬에도 아픔은 있었다. 인근 대도시에서 1975년부터 15년 동안 산업 폐기물을 불법 투기한 것이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섬 정화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워낙 방대한 규모였기에 ‘쓰레기 섬’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어 농수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생계를 위해 섬을 떠나는 주민이 점점 늘어났다. 그러던 2010년, 데시마 미술관이 문을 열고, 같은 해에 세토우치 국제 여술제가 열리자 관광객이 버려진 섬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섬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은 물론이다. 예술이 섬사람들에게 고향을 되찾아 준 것이다.
이에우라항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도착한 데시마 미술관의 첫인상은 잔디밭에 지은 새하얀 이글루 혹은 산기슭에 떨어진 우주선을 연상시켰다. 티켓 카운터에서 표를 사고, 정해진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나무 사이에 곱게 깔린 새하얀 길을 걷다 보니 금세 미술관 입구가 보였다. 사진을 찍거나 큰 소리를 내지 말아 달라는 직원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이고, 신발을 벗은 채 차가운 콘크리트 동굴 속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데시마 미술관은 최고 높이가 4.5m밖에 되지 않는 곡면 형태로, 고즈넉한 주변 풍경과 이질감 없이 어우러진다. 환경과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건축가 니시자와 류에의 구상이다. 그런데 미술관이라는 이름과 달리 액자에 담긴 그림은 하나도 걸려 있지 않은데, 대신 하늘을 향해 커다란 구멍 두 개가 뚫려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관람객은 무엇을 봐야 할까. 수없이 많겠지만 먼저 구멍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과 나무의 정수리를 본다. 실내∙외의 경계가 없다 보니, 길을 잃고 미술관에 들어오는 풀벌레와 낙엽, 그리고 신선한 바람을 맞이할 수 있다. 새하얀 여백 속에 존재하는 충만한 생명을 느낀다. 바닥에 앉아 느긋하게 관람할 것을 추천하는데, 자리를 잡기 전에 혹시 물방울이 지나다니는 길이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 바닥에 뚫린 작은 구멍에서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물방울이 미술관 여기저기를 뱀처럼 활보하기 때문이다. 물방울이 순백의 콘크리트에다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다른 물방울을 만나 굵어지기도 하고 힘없이 흩어지기도 한다. 그러고는 고인 물을 만나 작은 샘을 이루거나 빈 구멍에 빨려 들어가 소멸한다. 눈으로 보고 있지만, 믿기지 않는 광경이다.
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물에 생명을 불어넣은 사람은 현대 미술가 나이토 레이다. 햇빛과 구멍, 물의 속도와 그 관계를 치밀하게 계산하고 수없이 실험한 결과다. 작은 콘크리트 구멍에서 태어나 관계를 맺고, 무리에 소속되었다가, 결국 무(無)로 돌아가는 물방울의 짧은 생애는 인간의 삶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또한, 이글루나 우주선으로만 보였던 데시마 미술관이 갓 태어난 물방울의 형태와 흡사하다는 사실도 이내 깨달았다.
데시마 미술관은 아무리 낮은 소리라도 크게 증폭시키는데, 평소처럼 가방을 바닥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가 소리가 천둥같이 울리는 바람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미술관 바닥을 구르는 벌레의 날갯짓도 요란하기 그지없는데, 쏟아지는 비와 눈은 과연 어떤 소리로 공명할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공간에서 자연의 생명력은 무엇보다 역동적이었으며, 그 안에서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어느 때보다 명확하게 느껴졌다.
관람을 마친 뒤에는 바로 옆에 있는 카페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데시마 미술관과 비슷한 모양으로 지었기에 역시나 둥근 벽면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데, 미술관에서와 달리 유리가 끼워져 있다. 닫힌 공간을 받아들이는 감각이 잠깐 사이에 변했는지, 그 모습이 새삼 답답해 보였다.
미술관을 나오자 끼니때가 한참 지나 있었다. 데시마의 유명한 식당인 시마키친이나 우미노레스토랑에 가려고 했지만 야속하게도 지갑에는 백 엔짜리 동전 몇 개뿐이었다. 일본에서는 교통 시설이나 상점, 식당에서 카드를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현금을 미리 준비해두어야 하는데, 아침에 급하게 오느라 지갑을 확인하지 못했다. 순간적인 결정에 따른 가혹한 대가였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다카마쓰항으로 일찍 돌아가면 그만큼 새로운 여행지에 갈 여유가 생기는 데다, 지금이 내 인생의 마지막 데시마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매 순간 변하는 햇빛과 바람에 맞춰 흐름을 달리하는 미술관의 물방울처럼, 그때그때의 상황과 감흥에 충실한 나의 여행 스타일은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 세나북스 단행본 『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의 미리 보기 연재입니다. 본 포스팅에는 책에 싣지 못한 사진이 추가되었습니다. 출간된 도서는 총 21편의 에세이와 여행 정보, 이용 팁, 추천 코스 등을 포함하며, 서점 또는 인터넷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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