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마쓰 리쓰린공원 栗林公園
길에서 두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어딘가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여행을 할 수 없고, 과거를 잊지 않으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으며, 마음을 번잡하게 하는 일을 떨쳐 내지 않으면 평온을 찾을 수 없다. 오로지 한 걸음씩 앞으로만 내딛는 걷기라는 동작은 그래서 명상이기도 하고, 순례이기도 하고, 치유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에서는 가가와현에서 찾은 나만의 워킹 테라피 명소를 실었다. 준비물은 편한 옷과 걷기 좋은 신발, 수분을 보충할 물, 그리고 한여름이라면 모자와 손수건 정도면 충분하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사람에게 서서히 물드는 것처럼, 같은 길을 여러 번 걸으면 나도 모르게 그 풍경을 닮게 될까. 그렇다면 나는 리쓰린 공원을 걸으며 그 격조 높은 정취를 닮고 싶다. 공원의 장엄한 배경이 되어 사시사철 짙은 녹음을 선사하는 시운산의 절개, 전체 면적이 75만㎡에 이를 정도로 광활하지만 한 치 흐트러짐 없는 기품,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경치가 바뀌어 ‘일보일경(一歩一景)’이라 부른다는 빼어난 미색, 그리고 산책하는 이의 동선을 미리 계획하고 준비한 사려 깊음까지. 공원에도 성격이 있다면 리쓰린공원은 내 이상형에 가깝다. 그 품격과 가치를 인정받아 일본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특별 명승지로 지정되었으며 세계적인 여행 안내서 미쉐린 그린가이드 일본 편에서는 최고 평가인 별 세 개를 거머쥐었다.
리쓰린공원은 에도 시대(1603~1868) 초기인 1642년부터 백여 년에 걸쳐 지어졌다. 총 6개의 연못을 따라 산책하며 곳곳에 마련된 정자와 13개의 인공 산, 잘 다듬은 산수(山水)를 유유자적 즐기는 방식이다. 이런 정원 양식을 ‘회유식(回遊式)’이라고 부르는데, 옛 지방 영주가 산책길에 원하는 풍경을 입혀 두고 사교의 장으로 활용하곤 했다. 그들만의 작은 낙원이었던 셈이다. 리쓰린공원 역시 다카마쓰를 대대로 다스리며 막대한 권력과 부를 거머쥐었던 마쓰다이라 가문이 1745년에 완성하여 수백 년 동안 별장으로 사용했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1875년. 마치 비밀의 정원처럼, 바깥세상이 급변하는 동안에도 과거의 영화에만 시간이 멈추어 있었다.
리쓰린공원에서 추천하는 정식 산책법은 이렇다. 공원을 산책하는 코스는 크게 ‘북쪽 정원 산책 코스’와 ‘남쪽 정원 산책 코스’ 두 가지가 있다. 둘 중 하나를 선택, 입구에서 나누어 주는 팸플릿 속 지도를 시우산을 향해 펼쳐 들고 걷는다. 현대적인 분위기의 북쪽 정원에는 잔디광장과 꽃창포원, 오리 사냥터가 대표적인 볼거리다. 일본의 고전적인 정취가 가득한 남쪽 정원에서는 난코 연못에서 뱃놀이하거나 곳곳에 세워진 다실에서 전통차를 즐기기 좋다. 정해진 두 코스를 전부 걷는 데는 두 시간 가까이 걸린다.
다카마쓰에서 지내는 동안 리쓰린공원을 세 번이나 방문했지만, 사실 한 번도 이 추천 코스대로 걸어 보지 못했다. 처음 갔을 때는 한 일본인 할아버지가 집요하게 말을 걸며 식사를 권하거나 개인 연락처를 물어보는 탓에 도망치듯 공원을 빠져나왔다. 두 번째 갔을 때는 공원 안에서 일본 전통의상인 유카타를 빌려 입었는데 옷과 함께 빌린 나막신이 너무 불편해 15분 이상 걸을 수 없었다. 마지막에는 편한 신발과 바지로 단단히 무장하고 갔지만, 가만히 있어도 땀이 쏟아지는 한여름 무더위에 비장한 각오가 꺾이고 말았다. 하지만 정식 산책 코스를 따르지 않고 공원을 자유롭게 활보한 덕분에 나만의 지름길 코스가 탄생할 수 있었다.
나는 북쪽 공원은 그날 마음 가는 만큼만 걷고, 남쪽으로 세이코 연못을 따라가다 오케도이노타키(桶樋滝)라는 인공 폭포 앞에 앉아 물줄기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지금은 윗물이 자동으로 채워지지만, 옛날에는 사람이 직접 물을 산 중턱까지 운반해 영주가 지나갈 때에 맞춰 흘러내리게 했다고 한다. 쉴 새 없이 떨어지는 폭포수를 보고 있으면, 오로지 한 사람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 물을 채우고 내려보내기를 반복했을 작업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그 일꾼의 눈에는 속절없이 흐르는 폭포수가 얼마나 야속했을까.
오케도이노타키에서 동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리쓰린공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다실 기쿠게쓰테이(掬月亭)가 나온다. 직사각형 다다미 마루와 미닫이식 문이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어 정갈하고 고요한 운치가 감돈다. 입구에서 차를 주문해야 들어갈 수 있는데, 녹차 가루를 저어 만든 맛차(抹茶)와 잎으로 우린 센차(煎茶) 중에 선택할 수 있다. 센차는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마시는 녹차와 비슷하기에, 표면에 촉촉한 거품이 일고 떫은맛이 덜한 맛차를 추천하고 싶다. 차에는 곁들여 먹을 만주나 화과자도 나온다. 씁쓸한 한 모금에 달콤한 한 입을 번갈아 즐기다 보면, 이곳에서 차를 맛있게 마시려고 리쓰린공원을 걸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쿠게쓰테이의 이름은 ‘두 손으로 물을 뜨니 달이 손안에 있다(掬水月在手)’는 당나라 시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먼 옛날 리쓰린공원의 주인은 그 이름처럼 연못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겼을 것이다. 낮에 달구경은 할 수 없지만, 마루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잎사귀에 부서지는 햇살과 신선한 바람, 그리고 새와 풀벌레 소리가 도시 생활에 무뎌진 감각을 일깨운다. 다다미에 벌렁 누워 한숨 자고 싶어 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으름의 유혹이 파고들 때,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본다. 아직 산책의 클라이맥스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둥근 엔게쓰교와 짧은 돌다리를 건너, 후지산을 본떠 만들었다는 히라이호 봉우리에 올라가면 난코 연못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리쓰린공원을 대표하는 전망이다. 이 풍경에 봄에는 벚꽃, 여름에는 신록, 가을에는 단풍, 그리고 겨울에는 눈꽃이 색을 덧입힌다. 주말에는 관광객이 탄 배가 오가며 생동감을 더하기도 한다.
이제 봉우리에서 내려와 출구를 찾아 나가는 것으로 나만의 작은 여정은 막을 내린다. 30분을 걷고 30분을 쉬는 한 시간짜리 코스인데, 함께한 지인은 모두 흡족해했다. 다만, 리쓰린공원은 정해진 경로를 따라 걸을 때 가장 아름답고 완전하도록 설계되었으므로 시간과 체력이 충분하다면 정식 코스에 도전해 보기를 바란다.
에도 시대 권력가의 낭만과 이상이 현실화된 리쓰린공원은 모든 것이 빨리 변화하는 도시의 삶을 잠시 잊게 만든다. 현재를 살며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것처럼, 한번 잃어버린 과거의 정취도 똑같이 되살릴 수 없다. 그래서 이토록 정성스럽게 보존된 고전적인 아름다움은 선인(先人)이 자손에게 남긴 선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원 안에서 끊임없이 소생하는 꽃과 화분 속 분재처럼 단정하게 손질된 천 그루의 소나무, 그리고 물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잉어와 자라를 보고 있으면 결국 이곳의 영원한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자연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 속 마쓰다이라 가문도, 오늘날의 다카마쓰 시민도 한정된 생애 동안만 이곳을 즐기다 떠난다는 사실은 나와 같은 여행객과 별반 다를 바 없기에…
※ 세나북스 단행본 『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의 미리 보기 연재입니다. 본 포스팅에는 책에 싣지 못한 사진이 추가되었습니다. 출간된 도서는 총 21편의 에세이와 여행 정보, 이용 팁, 추천 코스 등을 포함하며, 서점 또는 인터넷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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