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소설 <모순> 중에서
완벽주의만큼 완벽하게 불완전한 말이 또 있을까. 처음 맡은 일도 한치의 오차 없이 척척 처리해내는 능력은 정밀하게 프로그래밍된 기계에게조차 기대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어느 순간, 혹은 어떤 분야에서 만큼은 그 불가능한 목표에 사로잡혀 과도하게 스스로를 채찍질하고야 마는 것일까.
물건을 잘 잃어버리고 공간지각 능력이 떨어져 주변 사람에게 덜렁이로 소문난 나 역시 특정한 일에서 만큼은 이상한 강박을 느끼곤 했다. 예를 들면, 노트 필기. 학창 시절에 쓰던 공책을 펼치면 맨 앞의 두세 장은 어김없이 찢겨 있었다. 필기 초반부의 글씨체나 내용의 분류법, 줄 간격 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페이지를 전부 오려낸 뒤 새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술 수업 중에는 계획대로 완성되지 않는 그림을 몇 번이고 찢어버리는 바람에, 늘 시간에 쫓겼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의 수고를 물거품으로 만들지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드는 결과물을 원했던 것이리라.
이 몹쓸 습관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두 사람이 마치 서로를 위해 설계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리 없는 데도, 한 번 사이가 어긋나기 시작하면 유달리 포기가 빨랐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관계의 본질이건만, 나는 크고 갈등이 생길 때마다 속마음을 내보이며 부딪히기보다 한 발자국씩 물러나버리곤 했다. 덕분에 연인이든 친구든 사적으로 싸운 경험은 거의 전무한데, 겉으로 표출될 만큼 상처가 쌓이기도 전에 이미 관계가 끊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의 잘못이든 트러블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점도 지나친 이상주의, 혹은 완벽주의가 낳은 부작용이 아니었을까.
물론 완전무결을 추구하는 성향이 늘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학생 때는 평균 점수 0.1점과 등수 1칸에 목숨을 건 덕분에 그럭저럭 우수한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고, 사회에 나온 뒤로는 실수를 지적받을까 두려워 타고난 성격보다 꼼꼼하게 업무를 처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생활의 단면에서 누군가로부터 채점이라도 당하듯 가슴 졸이며 사는 삶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그저 더 많은 오답을 내기 전에 끝내고 싶은 길고 긴 시험처럼 느껴질 뿐.
더군다나 한 번 실패한 일이라면 일단 폐기 처분한 뒤 원점에서 출발하려는 경향은 삶 자체가 불만족스러울 때 무척 위험해진다. 까짓것 공책이나 스케치북, 그리고 백번 양보해서 어차피 오래가지 않았을 인연 따위 얼마든지 잃어도 좋다. 그러나 인생은, 게임처럼 리셋 버튼도 없이 오직 한 번만 주어지는 인생은 어쩔 것인가.
고백컨데, 20대에는 인간관계나 취업, 이직에 실패할 때마다 두 번째 기회가 오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 리셋 버튼을 눌러버리고픈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다. 다행히 지금은 당시의 경험 덕분에 스스로가 불완전한 인간임을 뼛속 깊이 깨닫고, 실패를 성장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쯤으로 여긴다. 누구에게나 이번 생은, 아니 오늘 하루조차 처음인데 일을 좀 그르치면 어떤가.
더군다나 아무리 나이가 들고 경험치가 쌓여도, 얄궂은 인생은 그에 걸맞게 더 어려운 역할과 과제를 부여한다. 아마 40대, 60대, 아니 100세가 되어도 나란 인간은 허점투성이에 불과하겠지. 그러니 핵심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이미 저지른 실수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개선해나가려는 태도다. 과거의 얼룩은 지워지지 않는다. 실패의 흔적까지 담담히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우리의 불완전함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