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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은 Apr 02. 2020

취향이라는 이름의 성역

취향

우리에겐 지극히 개인적인 즐거움으로 가득 찬
각자의 행성이 필요하다.

김민철 에세이 <하루의 취향 중에서>



누군가의 개인적인 취향을 얼마나 파악하고 있느냐는 관계의 친밀성이나 애정의 깊이를 가늠하는 척도 중 하나다. 선호하는 파스타 소스 같은 지극히 사소한 식성에서부터 문화예술이나 인간관계를 향유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무언가에 대해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표준대국어사전) 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고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작 스스로의 취향에 대해서는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을까.


사실 아무리 자신의 취향이라 할지라도 완벽하게 알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유전의 영향도 있겠지만, 결국 마음의 문제라 상황이나 경험에 따라 조금씩 바뀌어가기 마련이므로. 예를 들면, 지금의 나는 20대 때와 달리 몸에 딱 붙는 원피스나 진한 메이크업을 선호하지 않게 되었다. 옷장에는 폭도 길이도 넉넉한 원피스가 잔뜩 걸려 있고, 세면대에는(화장대도 쓰지 않는다) 기본적인 화장도구 대여섯 개가 전부다. 물론 사회적인 시선이나 불어버린 몸무게 탓도 있지만, 결정적 이유는 주관적인 미의 기준, 즉 취향이 바뀌어서다. 자기 위안일지 몰라도, 요즘에는 나를 볼 때나 남을 볼 때나 자연스럽고 편안한 모습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한편, 수십 년째 한결같은 취향도 있다. 이를테면, 어릴 때부터 고수나 홍어, 피단처럼 많은 이들이 기피하는 음식에는 사족을 못썼지만, 생 당근이나 피망은 입에 넣는 상상만 해도 여전히 눈살이 찌푸려진다. 또, 낯선 사람이 즐비한 사교 모임에 가면 화장실에 가서 숨고 싶어질 정도로 에너지가 바닥나는 반면, 소수의 친구들과는 밤을 새우며 술을 마셔도 피곤한 줄 모른다. 10대 때부터 색깔은 보라색이나 자주색 계열을 선호해 왔고, 책은 소설보다 수필을 즐겨 읽으며, 음악은 담담하게 말하는 듯한 노래가 듣기 편하다.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든, 이런 대쪽 같은 취향은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 작은 기쁨을 찾아주는 방향 잡이 역할을 한다.


30대에 접어들어서 삶이 조금이나마 편해졌다면, 그 이유는 아마 내 취향을 파악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덕분일 것이다. 마음에 없는 자리에 나가 억지로 미소 짓지 않아도, 교양 있어 보이기 위해 장식용이 될 베스트셀러를 사지 않아도, 남들이 다 보는 드라마를 혼자만 몰라도 큰일이 일어나지 않음을 이제는 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여가 시간, 내게 기쁨을 주는 일에만 탐닉기에도 아깝지 않은가.


가끔은 호불호라는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험을 할 필요도 있겠지만, 타인의 시선에 맞추려 내키지 않는 일을 스스로에게 강요하거나,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이른바 ‘덕질’을 감출 필요는 없다. 취향은 타고난 성향과 과거의 경험이 쌓여 독특하게 빚어진 나의 개성 그 자체이니. 타인 혹은 본인에게 해를 가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요즘 유행하는 ‘개취존(개인 취향입니다, 존중하시죠)’이라는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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