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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은 Mar 06. 2020

포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단념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중에서


어린 시절에는 죄악이라고 배웠지만, 살아 보니 그다지 나쁘지 않은 행동 중 하나가 바로 포기다.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넣는 삶 따윈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든지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내 계획을 어그러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현실 속 골리앗을 만났다면, 스스로를 다윗이라 착각해서 과감히 맞서다 만신창이가 되느니, 줄행랑을 쳐서라도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만화 원작의 일본 드라마로 2016년 인기리에 방영된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逃げるは恥だが役に立つ)>도 비슷한 교훈을 준다. 심리학으로 석사 학위까지 취득했지만 취업난에 파견 사원으로 일하던 주인공 미쿠리는, 그마저도 계약이 종료돼 백수가 되고 만다. 하지만 원망해 봐야 소용없는 일. 돈이라도 벌기 위해 가사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데, 그곳에서 집주인 히라마사를 만난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모태 솔로이자 누구보다 이성적인 공대남. 미쿠리는 히라마사를 설득해 전업주부를 가장한 입주 가사 도우미로 계약 결혼을 성사시킨다. 커리어우먼으로서 자리잡지 못하고 ‘취집’으로 도피하지만, 그 자리에서 가사 도우미도, 전업주부도 아닌 새로운 일과 사랑까지 발견한다는 줄거리다.


내가 미쿠리에게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어떤 시련에도 경쾌하게 대처하는 성정과 모든 일에 프로 의식을 갖고 임하는 성실한 자세 때문이었다. 아무리 낙천적인 그녀일지라도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라는 생각이 한 번쯤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을 터. 그러나 반복되는 취업 실패로 자기 비관에 빠지기는커녕, 산뜻하게 털어내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그토록 놀라운 회복력과 낙천성에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살다 보면 아무리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무언가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배부른 소리지만, 10대 후반의 내게는 외국 명문대가 그런 존재였다. 가정 형편은 소박한 편이었는데도, 해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보니 미국이나 캐나다의 유명 대학에 가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었다. 교내에서는 나름 우등생에 속했지만,  당시 지원한 학교에 들어가려면 졸업장 하나에 수억을 투자할 경제적 여유나 진짜 영재들을 물리치고 장학금을 거머쥘 정도의 스펙 정도는 있어야 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면 어떻게든 되리라는 철없는 믿음으로 도전한 입시 결과는 당연히 처참할 수밖에.


그 이후로 한동안 대학은 내 약점이었다. '무슨 대학을 나왔냐'라는, 사회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찌릿했다. '처음부터 현실적인 목표를 세웠더라면', '시험 점수가 조금만 더 높았더라면', '다른 장학금 제도를 알아봤더라면' 등 입시 결과를 바꿨을지도 모를 수많은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그러나 차선으로 택한 대학을 졸업한지도 어언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그때의 치기 어린 도전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사실에 연연해 오늘을 망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다. '마지막 한 번'이라는 생각으로 공들인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운명이다 싶었던 기업으로부터 불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내심 대박을 기대했던 작업의 결과물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혹은 영원할 줄 알았던 연인의 마음이 돌아섰을 때. 모든 것을 쏟아부었음에도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했다면, 단념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 때까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새로운 선택지로 눈을 돌릴 수가 있으니.


포기라는 행위는, 때론 도전보다 더 큰 용기와 결단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내 앞에 펼쳐진 무수한 갈래의 길 중 하나를 닫았다 해서 삶이 끝날 리 없다. 스스로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지나간 기회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일. 그리고 당장 내가 바꿀 수 있는 미래에 온전히 시선을 집중시키는 일. 그것이야 말로 포기의 미학이자 진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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