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어는 대구 사투리다
언어는 내게 늘 신비로운 존재였다.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걸으며 하루하루 새로운 낱말을 배우고 사용했던 즐거움을 기억한다. 국제학교를 다닐 때 미국인 선생님의 농담에 혼자 웃지 못하던 내가 처음 제 때 알아들은 날, 그리고 몇 년 전 일본어 드라마를 처음 자막 없이 보게 된 날을 기억한다. 의사소통을 위한 사회적 약속인 언어는 그 사회에서 나를 표현할 수 있게 해 주고 외국어는 새로운 문화 습득의 기회를 열어준다.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난 나의 모어는 대구 사투리라고 불리는 동남 방언의 한 갈래다. 학교에서는 표준어를 구술된 교과서를 쓰고, 드라마에 나오는 서울말을 가끔 흉내내기도 했지만, 저녁때가 되면 할머니는 '밥 먹어'가 아닌 '밥 무래이'을 반복하셨고, 나 역시 일이 잘 안 풀리면 '어떡해'가 아닌 '우야노'를 외치고 살았다.
중학교 3학년, 고향 사람이 별로 없는 학교에 가서야 처음으로 내 말투가 '이상하다'라고 느꼈다. 그때부터 지방 억양을 감추는 법을 배워 지금은 아무도 내 출신지를 추측하지 못하지만, 아직까지도 '봉지' 대신 '봉다리'를 들고 싶고, 고기를 먹을 때는 '겉절이'보다 '재래기'가 생각나고, 일을 '똑바로'하기보단 '단디'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이것이 모어의 힘이 아닐까 싶다.
지금도 방언은 코미디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이긴 하지만, 예전보다는 이미지가 많이 좋아졌다. 대구 출신이라고 밝히면 간혹 '오빠야' 한 번만 해달라는 사람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귀엽다’나 ‘재미있다’는 표현 역시 방언을 내려다보는 입장에서 느끼는 감정이고, 어쨌든 '세련되지 못하다'는 인상은 여전하다. 더군다나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는 국립국어원의 정의는 반대로 방언은 교양 없는 사람들이 쓴다는 말인가 하는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어릴 때부터 체득한 표준어의 우월성에 의문을 품게 된 건 대학교 때부터였다. 홍콩대학교에서 공부한 나는 순진하게도 홍콩에 가면 중국어를 배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홍콩 사람들은 표준 중국어가 아닌 광동어를 사용했다. ‘니하오’가 아닌 ‘레이호우’인데 성조는 9개나 됐다. 내륙에서 온 중국인은 이를 방언으로 치부했지만, 대학교에 어엿한 강의와 교재가 있었고, 사용 인구는 4천만 명이나 됐다. 특히 홍콩의 젊은 엘리트층은 광동어와 영어를 섞어 사용함으로써 고유 정체성을 표출하는 듯했다. 내 안에서 방언과 언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현대 국가가 탄생해 표준어를 정의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자신이 숨 쉬듯 말하는 언어를 틀리다거나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표준어는 특정 방언에 기반하여 사람이 규정한 언어이므로, 표준어가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방언이 존재한다. 나아가, 모든 언어는 그저 사회적 지위를 부여받은 ‘방언’에 불과하다는 입장도 있다.
흔히 우리가 사투리로 치부하는 생각하는 제주 방언은 사실상 표준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므로 학자에 따라 ‘언어’로 분류하기도 한다. 특히, 유네스코의 <세계 소멸위기 언어 지도(The Atlas of World’s Endangered Languages>에도 엄연히 언어로 기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까지 방언을, 아니 언어 자체를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닐까. 애초에 언어는 무엇이고 표준어는 왜 만들어진 것일까. 그리고 한국의 제주어가 있다면, 중국에도 방언으로 치부되는 수많은 말이 있고, 단일 언어 국가임을 내세우는 일본 역시 오키나와 토박이말인 류큐어와 홋카이도 원주민이 쓰던 아이누어가 소멸 위기 '언어'로 분류되어 있다.
한 영토 내에서 소수 집단이 쓰는 언어를 일 컫는 '소수 언어(minority langauge)'는 이처럼 동북아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만연한 현상이며, 슬프게도 점점 그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그 속에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소수언어 이야기>는 대학원에서 문화학을 전공한 한 평범한 번역가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방언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언어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고 아름다우며 더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것은 있어도 본질적으로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은 없다. 모든 언어는 인간의 창의력이 탄생시킨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연재물은 말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공동체의 삶과 문화에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대부분도 한 개 이상의 언어를 배운 경험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아마 그 언어는 영어나 표준 중국어(보통화), 일본어와 같은 메이저 언어였을 것이다. 책꽂이 어딘가에 토익이나 HSK, JLPT 문제집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노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이들 언어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 글은 소수 언어 배우기를 종용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돈이 되는 외국어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바람 앞 등불과도 같은 소수 언어에게 조금이라도 나눠주기를,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언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조심스럽게 바랄 뿐이다.
2018년 1월 16일
글로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