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 위기 언어를 지켜야하는 이유
한국에서 한국어를 쓰고, 일본에서 일본어를 쓰듯 한 나라에 하나의 언어가 있다고 생각하면 세계에는 약 200개의 국가가 있으니 200개의 언어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도처럼 여러 언어를 쓰는 나라도 있고, 아마존 정글 어딘가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부족 언어도 있을 수 있으니 넉넉히 잡아 천 개 정도 잡는 것도 꽤 논리적이다.
틀렸다. 대부분 언어학자는 세상에 약 6,500개에서 7,000개의 언어가 존재한다는 데 동의한다. 다양한 언어 관련 통계에서 자주 인용하는 사이트 에스놀로그(http://www.ethnologue.com)에는 총 7099개의 언어가 등록되어 있지만 사실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아직까지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언어가 어딘가에 존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언어는 마치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사라지고 생겨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5개의 언어만 유창하게 구사해도 천재 소리를 들을 텐데 7천 개는 살면서 접해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23개의 언어만 알아도 세계 인구의 반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한다. 전 세계 언어의 약 0.4%가 세계 인구의 절반에게 전파된 것이다. 마치 상위 1%의 재력가들이 전 세계의 부의 반을 차지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마디로 암담하다. 지금도 2주에 한 개의 언어가 사라지고 있고, 전문가들은 21세기가 끝나기 지상에 존재하는 반 이상의 언어가 소멸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지난 2010년 유네스코에서 발표한 <소멸위기에 처한 언어 지도(Atlas of the World's Languages in Danger)>에 따르면 약 2,500개의 언어가 소멸위기 언어로 분류되어 있다. 유네스코는 언어의 죽음을 막기 위해 제도적 변화와 관심을 촉구한다. 소멸 위기 언어도 마치 멸종 위기 동물처럼 보호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대로 언어의 수가 줄어들면 더 편해지지 않을까. 어릴 때 외국어 공부로 골머리를 앓으며 ‘세상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언어를 쓰면 안 될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실제로 세계 공용어에 대한 필요성은 누구나 느끼고 있는지, 1887년 한 폴란드 의사가 에스페란토라는 가상의 언어를 만들어 퍼트린 적이 있다. 모국어가 다른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를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영어가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니 굳이 에스페란토를 배울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나의 철없는 망상처럼 누군가가 ‘이제부터 전 세계적으로 영어만 쓰기로 했으니 한국어는 쓰지 말자’고 주장하면 어떨까. 당연히 반대할 것이다. 한국어가 사라지면 더 이상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말에는 우리만의 전통과 문화, 사고방식이 녹아들어 있다. 예를 들어 한국어로는 일상적으로 쓰는 '답답하다'는 말을 외국어로 옮기려면, 좌절감을 느낀다거나(frustrated), 비좁게 느껴진다거나(cramped), 숨이 막히는(stiflied) 등 무수한 단어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적절히 타협하는 수밖에 없다.
그 흔한 답답하다는 표현도 그런데, 잘 알려진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 꽃>이나 윤동주 시인의 <서시>는 더할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기를 바라는 마음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그 번민을 그 어떤 숙련된 번역가가 외국어로 옮긴다고 한들, 그 소리의 울림과 감정의 결이 원문과 같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의 백성을 위해 문자를 만든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우리만의 역사이며,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한글의 독창성과 효율성은 한국인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사라져 가는 언어를 보호해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말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면, 다른 말도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있는 것이다. 모든 언어는 그 공동체의 역사와 전통, 문화, 사고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은 정체성의 표식이기도 하다.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다면, 그 언어가 품고 있던 세계관도 인류의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이다. 많은 언어학자나 인류학자가 언어를 부활시키지 못한다면 기록물로라도 남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소멸위기 언어는 사회적 약자와 인권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소수 언어(minority language)는 한 국가나 영토에서 소수 집단만이 사용하는 비주류 언어로 어디까지 상대적인 개념이다.
한국어가 한국에서는 '국어'이지만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에서는 조선족이나 자이니치, 고려인 등으로 불리는 소수 집단만 쓰는 소수 언어가 될 수 있다. 이들은 차별을 피하기 위해 주류 집단의 언어에 동화되기 쉽다. 지금은 한국의 경제적 발전 및 한류 열풍 덕분에 한국어를 일부러 배우는 외국인도 많지만, 이처럼 든든한 ‘홈그라운드’를 갖고 있는 운 좋은 언어는 그리 많지 않다. 해당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소수 언어를 지원해주지 않는다면 일상생활에서 차별을 겪는 것은 물론, 교육과 의료, 법률, 금융 서비스 등 당연한 권리가 제한되기도 한다.
소수 언어라고 해서 모두 소멸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멸 위기에 처한 언어는 대부분 소수 언어다. 그 나라, 그 지역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약자인 사람들의 언어다. 그래서, 소수 언어를 보호하는 것이 곧 소멸 위기 언어를 구하는 것이다. <소수 언어 이야기>는 쓰는 큰 동기 도 이들이 세상에서 잊히는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원에서 소수 언어를 연구하며 놀랐던 사실은, 생각보다 수동적으로 주류언어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의 언어를 지키기 위해 주도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나의 부족한 글이 그 험난하고 용감한 움직임에 힘을 실어 주고, 언어의 다양성을 수호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