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서 주로 막내포지션일 때가 많았던 나는 유독 동생들을 예뻐했다. 학교에서 만난후배들은 내가 저들을 알뜰살뜰 챙기니, 취직을 해도 나 같은 선배만 만나면 소원이 없겠다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 과거의 나 역시 후배는 응당 예쁜 존재니까 회사 후배 역시 그럴 줄로만 알았다. 돌이켜 보면 꽤 교만한 생각이었다. 부처나 마더 테레사도 아니고, 누군가를 포용하는 그릇도 작은 주제에 건방졌다.
회사 안에서의 인간관계는 내가 겪어온 바깥세상의 것과 차원이 달랐다. 연차가 쌓일수록 새삼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점이 바로 윗사람 스트레스 못지않은 아랫사람 스트레스였다. 회사에서 선후배 사이란조금 다른 결의 의미였다. 일로 만난 사이라는 커다란 전제가 붙는 관계로, 그 안에는 복잡한 상호작용이 숨어 있었다. 물론 나의 기호 탓에 웬만한 후배들은 다 옆구리에 끼고 다녔지만, 가끔 용납할 수 없는 선을 넘는 후배들도 더럿 있었다.
잘해주니, 점점 예의를 차리지 않는 후배
나는 되도록 내가 선배들에게 받은 친절을 후배들에게도 빠짐없이 베풀려고 하는 편이었다. 그 대상에는 특별한 조건이 붙지 않았다. 물론 약간의 편애는 있었겠지만 모든 후배들에게 똑같이 잘해주려 늘 신경을 기울이곤 했다. 하지만 똑같이 내민 손길에 돌아오는 반응은 저마다 결이 달랐다. 대다수의 후배들이 감사인사를 표했고, 그로써 꾸준히 좋은 관계를 이어나갔지만 그밖에 경우도 있었다. 모름지기 개개인이 성격이 다른 법이고, 무언가를 바라서 친절을 베푼 것은 아니었지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후배도 있었다. 후배가 나를 편하게 생각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다소 격 없이 굴었던 내가 잘못이었을까. 점점 말이 짧아지고 나를 이겨 먹으려는 태도가 보이는 모습에 회의감을 느꼈다. 편하게 대하라는 말이 나를 네 친구처럼 생각하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점점 도가 넘은 행동을 하는 후배 앞에 나는 결국 표정을 굳혔다. 예전 같지 않게 딱딱한 나의 사무적인 자세가 영 당황스러웠는지 후배는 날 멀리하기 시작했다. 나를 한번 더 실망시킨 후배에게 한 꼬집 이해심만 겨우 남겨두고선 나 역시 가차 없이 돌아섰다.
뚱한 표정에, 군소리가 많은 후배
명쾌한 대답과 또렷한 목소리, 군대에서나 요구할 법한 상명하복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일을 시키면 고개 정도는 끄덕이고 한 번 해보겠다는 의지만 내비쳐주면 내 입장에서는 감사할 일이었다.회사가 일하러 오는 장소인 것을 망각했을까? 아니면 월급은 따박따박 받으면서 일 하기는 싫은 괴도 루팡인가? 일을 시키면 입이 한 바가지 나와서는 뭐 씹은 표정으로 대답을 뭉그러트리는 후배는 참 난감했다. 백 번 양보해서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생각했으나, 꼭 내가 들으라는 마냥 혼잣말로 구시렁거리는 것을 볼 때엔 턱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욱하고 올라오는 성화를 잠재우려 노력했건만 한날은 도저히 눈을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 무엇이 그리 불만이었는지 업무 지시를 받고 자신의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내리치는 소리에 눈이 뒤집혔다. 잠시 커피를 마시러 나가자며 후배를 사무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혹시 업무를 하며 속상한 일이 있냐고 조근조근 물으니 표정은 죽상이면서 입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게 아닌 것을 알았기에 다시 한번 채근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결국 나는 그 후배에게 일 시키기를 그만두었고 그는 인턴십 종료 후 정규직 전환에 실패했다.
알겠다고 하고선, 일을 엉터리로 하는 후배
무언가 부탁을 하면 늘 한결같이 단번에 이해했다며 긍정의 표시를 하는 후배가 있었다. 조금 설명이 부족한 듯싶은 말에도 '뭘 그쯤이야'하는 자신만만한 얼굴은 깊은 신뢰감을 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결과물들은 늘 나의 뒤통수를 세게 때렸다. 그럼에도 나는 후배가 아직 업무가 단련되지 않아 그런 것이라 이해했다. 시간이 지나 후배는 어느새 2년 차가 되었고, 이제는 후배를 마냥 이해해줄 수도 없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모두들 그 후배가 이제는 어느 정도 제 몫을 해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 자체가 문제였을까. 팀장이 후배를 불러 제법 굵직한 일을 넘겨주었다. 한 번 해보라는 취지였고, 후배는 내게 그랬던 것처럼 웃음을 지으며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기한을 꽉 채워 제출한 후배의 보고서에 팀장은 얼굴을 붉혔다. 보고서의 맥락을 전혀 이해 못한 것 아니냐며 소리를 질렀다. 문제는 이미 담당자인 후배가 퇴근을 한 직후의 일이었다. 이미 차를 타고 떠나버린 후배를 부를 수는 없었다. 그로 인해 당장 다음 날 미팅에 써야 했던 그 보고서의 뒤처리는 고스란히 나의 일이 되었다. 후배를 책망하지 않기로 생각하고 그 일은 조용히 묻기로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후배에게 다른 업무를 지시하던 날, 그를 붙잡고 간곡히 부탁을 했다. 제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다시 물어봐달라며 진심을 토해냈다. 후배는 또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후배는 또다시 일을 엉터리로 가져오고야 말았다. 치아가 으스러질 만큼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후배에게는 다른 방법이 필요한 것 같아, 결국 제대로 이해를 한 게 맞는지 질문을 하니 후배는 눈동자를 굴렸다. 다소 황당해 알지 못하면서 왜 아까는 이해한 것처럼답했냐 물으니 돌아온 후배의 말에 맥이 다 풀렸다. "저는 그런 적 없는데. 제대로 안 알려주셨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