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적이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단합심
미움받을 줄도 알아야 하니까.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서로 거리를 두고 혼자를 자처하는 팀원들이 끝내주는 단합력을 가질 때가 있다. 우리 모두 즉 공통의 적을 씹는 일. 그것만큼 시간과 돈을 들이지 않고 팀워크를 향상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대체 무슨 이유로 중고등학생들도 아닌 우리가 우르르 몰려 절제되지 못한 조금은 격 떨어지는 목소리로 누군가의 험담에 이리 즐거워질 수 있단 말이던가. 이유는 아주 심플하다. 내가 겪은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내 앞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울분에 쌓인 얘기를 토로할 때 박수를 치며 마치 나의 일인 마냥 가슴을 쓸어내리며 공감해 주니 이 사람들에게 호감이 안 생길 수 없다. 당장 호형호제라도 할 듯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를 주고받으니 턱 끝까지 차오르던 스트레스와 울화통이 조금은 사그라든다. 공공의 적이라는 맛있는 먹잇감이 생기자 우리는 어항에 먹잇감이 떨어질 때마다 조르르 달려가 물어뜯기 바쁘다.
나는 이게 결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것마저 없으면 꽉 막힌 회사에서 아가미를 잃은 금붕어처럼 숨통이 끊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득 내가 이토록 끈끈한 이들의 적이 되는 끔찍한 순간을 상상할 때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나만이 하는 상상이 아니기도 했다. 여느 날처럼 오늘의 경험담을 나누며 커피 내기를 하던 중에 불쑥 누군가 의뭉심을 제기한다.
"같이 욕할 사람이 있으니까 좋다. 근데 차장님 안 계셨으면 아마 다 내 욕 했을 거예요."
나는 그 이야기에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몰랐다. 어느 답을 하던 간 한쪽은 내 양심이 찔리는 일이었고 다른 쪽은 상대에게 미움을 사는 일이었다. 실로 이 무리는 차장님이 안 계시던 시절 그를 종종 험담했던 전과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사회생활에 녹아들어 버린 우리는 뻔뻔할 줄 도 알고 가끔은 자신을 능멸할 수도 있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몇몇은 미약하게 웃었고, 대부분은 왜 저희가 ㅇㅇ님을 욕하겠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입 안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게 중에서도 몇몇은 저들끼리만 아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단언컨대 한국인들에게는 누구에게 미움받을 바에야 손해를 자처하겠다는 것이 더 보편적인 사고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제 또래가 군집된 무리에서 더 강해지기도 한다. 훗날 내가 공통의 적이 되지 아니라 하는 법은 없다. 어쩌면 이미 나만 모르는 현재진행 중일 수도 있다. 곰곰이 생각해 봤을 때 그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은 채 회사를 다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평판이 뛰어나게 좋은 양반이 있을지라도 그의 평판에 묻혀 말하지 못했을 뿐 그 혹은 그녀가 제 입맛에 맞지 않는 이도 반드시 있을 테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배려를 가장한 손해를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베이스에 상대에 대한 관대함 한 스푼 그리고 상대에게 기대김일랑 일절 갖지 않는 마음 세 스푼이 더해진다면 회사에서 적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신 내가 감당해 내야 할 일은 그만큼 배로 불어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긴 시간의 회사 생활로 습득한 건 공통의 적은 웬만하면 되지 말 정, 몇몇 쯤에게는 미움받고 살아도 타격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누구를 미워하면서 내 몸까지 고통받을 바에야 미움을 받으면서 몸은 편한 게 나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실행하기가 어려울 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방어 태세를 취하는 게 퇴직금을 불리기에는 더 옳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