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80-90년대생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익숙한 교과과목이 있다. 바른생활, 슬기로운 생활, 도덕 더 나아가서 윤리까지가 그 과목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바른생활부터 시작하여 중학교 졸업 직전까지 우리는 필수적으로 도덕을 배웠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집에서 뿐 아니라, 밖에서도 도덕을 배우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덕목들을 익히고 자랐다. 도덕은 예를 중요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갈 우리에게는 어쩌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과목이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그 시간에, 나쁜 행동과 좋은 행동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배웠다.
예를 들어 철수와 영희 그리고 영수가 달리기 시합을 했다. 셋은 동일선에서 출발을 했고 시합을 하던 중 영수가 넘어졌다. 철수는 넘어진 영수를 지나쳐 도착지를 향해 달렸고 영희는 달리기를 멈추고 넘어진 영수를 일으켜 주었다. 당시 우리가 배웠던 도덕 안에서 이 지문은 명확한 답이 정해져 있었다.
'철수는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나쁜 아이, 영희는 곤경에 빠진 친구를 도와주는 착한 아이.'
이 지문 속 '나쁜 아이를 고르시오'라는 문제에 그 당시 나는 생각할 것 없이 철수를 적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아무 고민 없이 철수를 적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나이가 들고서야 학교에서 배운 덕목들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기 위한 목적에는 그다지 부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간혹 성실한 사람들은 서로 상충되는 가치관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즉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사회까지 이어진다는 말이다.
한 프로그램에서 방송인 ‘김구라’가 직장인들에게 다음 같은 조언을 한 적이 있다.
평소에 쉽지 않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줄 정도의 까칠함을 유지하세요. 인간의 본능적인 심리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기 때문입니다.
대체적인 맥락은 직장생활에서 마냥 착한 사람보다는 어느 정도 자기 할 말은 할 줄 아는 소신 있는 사람이 되어라는 말이었다. 나는 대체적으로 이 이야기에 조금 깊이 공감하는 편이다.
막 사회에 발을 디딘 사회초년생 시절 나는 '착한 성격'은 곧 신입사원이 가져야 할 디폴트 중 하나로 생각했다. 어떠한 자리에서도 웃는 얼굴, 긍정적인 대답, 바른 인사성, 거절이라고는 모르는 일관적인 태도. 이 4가지는 이유 불문하고 늘 지키기 위해 스스로가 부단히 노력했다. 노력에 대가를 바랐던 탓이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이 디폴트가 나의 직장생활에 이로운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굳이 이 고민을 수면 위로 끌고 와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것이 훗날 내 인생에 오류가 되었지만.
물론 그 디폴트의 이점은 있었는데, 누구와도 부딪히는 일이 없었고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되돌이켜 보면 제각각 다른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 어떠한 마찰음도 나지 않았던 나는 좋은 말로 하면 둥근 사람이었겠지만 나쁜 말로 하면 자기 의견이 없던 사람이었다. 꽤나 회사의 분위기가 수평적이고 나의 의견을 물어보는 직장상사가 더럿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건방지게 보일 수 있다는 생각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반대로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동기는 꽤나 활발한 타입에 고집이 있는 스타일이었다. 타당하지 않은 사유에는 반문을 제기할 줄 알았고, 어려운 자리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의견을 내 세울 줄 알았다. 그러던 날, 주니어급이 맡아줘야 할 중요한 업무 포지션이 생겼다. 주니어 급 중에 나는 가장 숙련도가 높은 레벨이었기에 모두들 내가 적임자라고 하였지만 윗선이 정한 적임자는 내가 아니었다. 그들이 택한 적임자는 앞서 말한 꽤나 고집 있던 동기였다.
업무를 덜었다고 생각하며 나름 담담하게 결과를 받아들였는데, 미안한 표정으로 내게 건네 온 팀장의 위로 인사는 나를 바닥으로 내리쳤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야. 잘 되는 일들은 과정에 잡음이 많아. 근데 너는 잡음 없이 갈 것 같아서. 되도록 맞춰주려고만 할 거잖아. 착해 빠져서.”
뒤에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가져다준 결과는 어릴 적 받던 선행상과는 그 결이 달랐다. 나는 이 이후로 많이 바뀌었다. 나를 옥죄이던 '착한 아이' 타이틀은 내려놓은 지 오래되었고 내가 지킬 덕목의 범주를 다시 정했다. 그 안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탈선도 했지만 나는 선을 메우기 위해 다른 방면으로 많은 노력을 했다. 이래서 인간은 입체적인 동물이라는 말이 나왔을는지 모르겠다.
착한 사람 좋지. 그런데 그뿐이야. 중요한 상황에는 결국 찾게 되진 않더라. 나 힘들 때만 생각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