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일터에 가면 '빨래통'들이 열을 지어 앉아있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저기에서 빨랫감을 하나둘씩 던지고 가면, 어느새 제 부피를 못 이기고 산더미를 만들어 놓은 빨랫감들은 그들 앞에 쌓여있다.
검은 빨래, 흰 빨래, 이건 손빨래… 매가리 없는 손으로 나름 정해진 규칙 속에서 일을 분류하고. 우선순위를 정한다. 입맛에 맞는 일만 하면 참 좋으련만 꼭 하기 싫은 일들만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꾸역꾸역 일을 쳐내기 시작하지만 빨래통은 비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나를 쳐내면 다시 하나가 생긴다. 일감은 애달픈 주인의 마음을 몰라주고, 제 몸집 불리기에 혈안이다. 마치 메달을 따고 성취감을 만끽하기도 전에 더 높은 기록을 요구하는 운동코치 마냥 일감은 직원들을 극한으로 밀어 넣는다.
차라리 정말 내가 세탁기였다면, 스스로 전원을 뽑아버리고 진즉 '셧다운' 해버렸을 텐데 그마저도 할 수 없다. 이유는 명료하다. 오늘을 살아내야 하니까.
아침 일찍 일터를 향해 걷는 내 두 다리는 기계적이다. 아무 목적 없이 매일 걷는 거리를 오늘 또 횡보한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면 '빨래통'들이 표정 없는 얼굴로 제각기 방향으로 흩어진다. 어느 순간부터 '살기 위해'가 목적이 돼버린 출근길은 하루하루 그 의미를 잃어간다.
비가 새벽부터 쏟아 내린 탓에 바지 밑단부터 양말까지 축축이 젖은 날. 가까스로 출근은 하여 사무실 자리에 앉았지만 내 모습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두 발은 바닥 아래로 푹 꺼질 듯 더 이상 기운이 남아있지 않고, 양 어깨는 100kg 덤벨을 올려놓은 것 마냥 손가락을 까딱할 힘 조차 없다.
도처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소리와 백색소음은 모두 내게로 와 증발된다. 또각또각 들려오는 구두 소리가 내 뒤에서 멈춘다. 빨랫감을 던지는 소리에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빨래통을 뒤집는다.
"정말이지 이제는 터져버릴 것 같아."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한 나는'번아웃'이 되고 나서야 현실을 직시한다. 정신력과 체력이 한계치에 다다르고 나면 둘러싼 환경에 처참히 패배한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자신을 돌보지 못한 죄는 생각보다 그 대가가 크다. 일을 관두는 것 외에는 이미 망가진 나를 지켜낼 방법이 없다.
다시 한번 살아보기 위해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타버리던 날'을 회상했다.
'불에 타버릴 것 같던 그 날처럼 재가 되어버릴 때까지 이제는 참지 않겠노라고. 물을 끼얹든 불을 피하든 다시는 그 어리석은 고통에 잠식되지 않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