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여행객과 흰 설경
'재스퍼 별로 안 춥네!'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우리가 날씨 어플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주말부터 급격하게 기온이 내려갈 거란 예보 때문이었다. 어제 엄마와 전화로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수요일부터 추워진대. 너도 옷 따뜻하게 입어.'
'에이 엄마, 거긴 한국이고 여긴 캐나다야.'
'지구는 다 똑같아!'
역시 어른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다음 주 날씨는 영하 30도라고 한다. 근데 솔직히 얼마나 추울지 궁금하고 기대돼. 따뜻한 옷이 워낙 많아서 그런가. 이상하게 자신감이 넘친다.
집 앞을 나서니 이런 풍경. 심플하면서 널찍한 재스퍼의 여유로움을 사랑한다. 저녁에 보면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빛나고 있어서 귀엽다. 2022년 밴프에서 보낼 크리스마스가 기대되는군.
오늘의 날씨는 맑다. 어제 마침 일을 마무리해둔 덕에 가벼운 마음으로 행선지를 고를 수 있었다. 우리가 고른 곳은 바로 멀린 캐년. 다만 택시비가 편도로 40달러고 팁도 줘야 하니 꽤 부담이다. 하지만 이런 돈을 아까워하면 여행을 할 수 없다. 한국에서는 400만 원 줘도 택시로 멀린 캐년을 보러 갈 수는 없으니까 기꺼이 지불해야지. 여행에서 쓰는 돈이 아까울 때는 경험을 사는 돈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한결 가뿐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
27살에 퇴사를 하고 무작정 스페인에 갔다. 하루하루 즐거우면서도 두려웠다. 돌아가면 돈이 없는데 어떡하지. 돈을 꾸준히 주는 회사도 더 이상 없고. 그래서 하루에 몇 번이나 은행 어플을 켜고 잔고를 확인했다. 그러던 내가 일기에 이런 문장을 남겼더라고.
'돈이 없으면 벌면 된다.'
단순하지만 맞는 말이다. 그 다짐처럼 돌아와서 열심히 돈을 벌었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캐나다에 오게 되었지. 걱정한다고 돈이 들어오는 게 아니다. 벌어야 들어오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일단 하자. 내게 주어지는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말이다. 어떤 기회는 정말로 한 번뿐이다.
레이어링 시스템
겨울 옷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를 하게 되면서 겨울을 덜 무서워하게 되었다. 이번 여행에서 얻은 큰 소득중 하나랄까. 방풍과 방한복에 대해 공부하고 따뜻하게 갖춰 입으니 뿌듯하다. 처음엔 내가 조언을 구하고 다녔는데, 이제는 내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도 든다. 레이어링 시스템. 대체 누가 이 개념을 개발했을까. 확실히 여러 겹의 옷이 있으니 체온 조절이 용이해서 좋다.
비니
생각보다 비니가 활동성이 뛰어난 소품이더라. 만약 누군가 겨울 여행을 온다면 비니를 가져오되, 너무 많이 챙기지는 말라는 당부를 하고 싶다. 왜냐하면 추운 지역에서는 비니가 다양하고, 가격도 저렴하거든. 오늘도 귀여운 피엘라벤 초록 비니를 샀다.
어제 먹은 브런치 가게가 너무 맛있어서 과수와 함께 다시 왔다. 과수는 귀여운 수프가 있는 세트를 시키고 나는 아보카도 & 햄 샌드위치를 먹었다. 햄의 퀄리티가 꽤 높았기 때문에 이것은 반드시 필승 조합. 콤부차를 함께 곁들이니 깔끔했다. 때로는 커피가 없는 하루도 말끔하고 좋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멀린 캐년. 거리는 차로 5분 정도. 가격은 40달러... 분당 거의 1만 원이니까 캐나다의 택시 드라이버의 시급이란 참 어마어마하다. 근데 차를 타보면 알겠지만 이곳저곳에서 불러서 엄청나게 바쁘다. 과수는 오늘 흰색 호두모자를 쓰고 왔다. 이 모자 너무 귀여워서 모든 여러분께 추천하고 싶다.
천천히 걸으면서 구경하기 좋은 멀린 캐년. 번호가 매겨진 다리가 여럿 있고, 저마다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물이 흐르고 녹음이 우거진 여름의 멀린 캐년은 어떤 모습일까? 다들 그 모습이 궁금한지, 여름엔 주차장에 자리가 없다고 한다. 오늘은 자리가 아주 많았고요. 멀린 캐년 주차장보다, 제천 의림지 주차장 자리가 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힙스터는 비수기의 절경을 감상한다네. 무과수와 이연처럼.
얼어붙은 폭포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잠깐 멈춘 세계 속에서 나만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영화에서 잠깐 무언가가 모두 정지한 세계에서 홀로 걷는 장면처럼,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옷을 여러 겹 겹쳐 입은 탓에 애플 워치를 볼 수 없었다. 시계를 볼 수 없으니 정말 시간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캐나다 일기를 즐겁게 보고 있다는 소식을 종종 들어서, 셔터를 누를 때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사진을 찍는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들, 한국에 전하고 싶은 풍경들, 그리고 하염없이 흰 세계를.
깊숙이 걸어 들어와 만난 아직 얼지 않은 호수. 푸르고 고요한 색이다. 물소리가 조용히 들린다. 어느 곳에서는 여전히 폭포가 흐르기도 한다. 그게 어쩐지 희망의 증거처럼 느껴져서 뭉클했다.
동굴처럼 고요한 푸른 물 자국.
하늘이 무척 푸르른 날이었다. 오늘 처음으로 아이젠을 착용해봤는데 생각보다 더 편하고 튼튼해서 기뻤다. 한국에서 떨어온 호들갑이 캐나다에서 이렇게 빛을 발하다니. 가슴이 웅장 해지는 순간이었다. 울 양말과 어그부츠의 콜라보 효과는 상당했다. 발이 전혀 시리지 않았음. 서울에서 추운 신발 신고 발 시려했던 찌질이 시절 내 모습이 떠오른다. 다시는 그런 수모를 겪지 않으리... 이번 여행을 통해 방한 패션 제왕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아님)
과수야, 그렇게 귀엽게 끼어들 거야?
과수야, 그렇게 물고기처럼 누워있을 거야?
과수야, 우리 행복하자!
가방을 내던지고 눈에 누우면서 즐겁게 논 92년생들. 눈에 누우니 정말 포근하고 기분이 좋았다. 여기 눈은 소금처럼 솔솔 흩날린다. 누우면 더욱 포근포근. 이런 곳에서 스키를 타면 좋다고 했던가. 한번 스키 클래스를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 하늘에서 본 비행기. 오늘 어찌나 희고 청명한 하루였는지. 캐나다에 와서 내가 평소에 입지 않았던 색의 옷을 많이 입고 있다. 그중 하나가 흰색과 녹색이다. 삶을 살아가며 다양한 나를 발견해서 즐겁고 기쁘다. 내일은 더욱 희게 입어야지. 솔직히 영하 30도 추위가 궁금하고 기다려진다. 한국에서는 추울 때 날이 맑던데, 캐나다도 그럴까?
돌아가는 길, 노을이 잔잔하여 아름다웠다. 4시면 해가 지기 때문에 적당히 놀다 들어가야 한다. 이런 루틴이 느긋해서 마음에 들었다. 서울에 돌아가서도 삶에 반영하고 싶은 점이다. 여행에 와서 기념품도 사지만, 이렇게 깨달음도 함께 얻어가는 것 같다. 4시에 돌아가서 쉬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마음으로 사는 게 얼마나 여유로운지 아는 것. 내년의 나는 또 하염없이 일하는 사람으로 살겠지. 그럴 때는 이 일기를 보고 기억해주길 바란다. 4시에 돌아가 줘. 그리고 샤워를 하고 편한 옷을 입은 다음 푹 쉬어.
영하 30도 기념으로 하드쉘 쇼핑 완료. 이로써 소원을 이뤘다. 등산용품이 풍년이니 한국 돌아가면 책임감을 갖고 겨울 산행 많이 해야지. 아, 그러고 보니 나 요가 안 한지 일주일이 넘었네? 요가 생각이 전혀 안 나는 나날들이었네.
저녁은 가볍게 술 한잔 하고 싶다는 과수의 말에 가보고 싶었던 재스퍼 브루어리에 왔다. 자세히 보면 모자도 새로 산 피엘라벤 모자입니다.^^ 아니 너무 귀엽지 않습니까... 하여튼, 사진 속 내가 먹고 있는 것은 검정 떡볶이가 아니라 캐나다 음식인 푸틴이다. 말이 캐나다 음식이지 그냥 감자튀김에 그레이비소스를 얹고 치즈를 버무린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나도 앞세울 수 있는 자작 요리가 많이 있다고요... 백종원이 캐나다에서 태어났다면 캐나다 음식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진짜 다양한 요리를 선보였을 텐데.
필름 카메라를 걱정하는 과수 사진으로 오늘 일기를 마무리한다. 추운 곳에 가니 카메라가 얼었는데, 숙소에 돌아오니 차츰 정신이 들었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