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 원 샐러드볼의 충격
오늘은 과수와 함께 샐러드 가게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둘 다 입맛이 비슷해서 여행하기 참 좋은 것 같다. 숙소 앞에 있는 거울이 클래식하면서도 예뻐서 좋다. 서둘러 바깥을 향하는 이연과 과수가 담긴 장면.
나는 오늘도 산악인이다. 근데 산에 절대 안 가죠? 한국 돌아가면 소백산부터 점령할 겁니다. 하여튼 오늘은 해가 좋길래 선글라스를 챙겨보았다. 너무나 수상하다. 등산가방에 맥북을 넣으니 막 무겁지 않아서 좋았다. 어제 대자연을 감상했으니 오늘은 재스퍼 시티에 머물면서 일하는 날이다. 이렇게 하루는 외부 활동을 하고, 하루는 쉬면서 일하는 루틴 괜찮은 것 같다. 누군가는 왜 캐나다까지 와서 일을 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여행을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서든 일하면서 살 수 있는지 이번 기회에 실험해보고 싶었다. 지금 해본 바로는, 무거운 짐만 잘 견디면 충분히 일 할 수 있다.
설경에서 사진을 찍어야 나중에 프로필로 쓸 수 있다며, 과수에게 계속된 부탁을 하여 30컷 만에 건진 사진. 너무나 마음에 든다. 카카오톡 프로필로도 변경해두었다. 무리한 부탁이어도 성의껏 들어주는 과수가 고맙다.
샐러드 볼 2개와 음료 2개, 다 합해서 5만 원 정도 나왔다. 서울, 우리 동네였으면 2만 5천 원이면 끝날 것을... 재료를 다 합쳐서 내가 만들어도 얼마나 싸게 만들 수 있는지 아는 우리는 다음엔 샐러드를 만들어먹기로 했다. 그런 각오로 밥을 먹고 산책을 하는 길에 큰 슈퍼마켓을 만났다. 이전에 들렀던 곳보다 훨씬 넓고 물건이 많았다. 아, 이 일기를 쓰면서 생각났는데 과수야 우리 냉장고에 있는 초코 아이스크림 안 먹었어.. 하여튼 마트를 발견해서 기쁜 우리는 저녁에 만나서 장을 보기로 했다. 그전까지는 각자 할 일이 있어서 카페에서 일을 했다.
밥 먹고 산책차 들른 아웃도어 가게에서 산 귀여운 가방. 이런 걸 지나치지 못하는 나는, 어디에서나 너무 나다. 끈과 안감, 모든 면이 다 다른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격은 55달러. 너무 귀엽지 않나요. 모두 재활용 원단이라고 한다. cotopaxi. 기억해두어야지.
오늘의 커피는 플렛 화이트. 이 카페는 4가지 옵션으로 양을 조절할 수 있는데, 그란데에 해당하는 사이즈로 시켰다. 노동할 때 먹을 커피니까 듬뿍.
오늘에서야 발견한 내 출근 카페의 치명적인 단점. 인터넷이 안 된다. 하지만 테더링은 되지롱. 창작을 할 때는 인터넷이 필요 없는 경우가 많아서 사실 크게 상관없다. 업로드할 때만 잘 신경 쓰면 된다. 오늘은 키노트 파일을 수정하고, 영상을 하나 만들었다. 업로드는 숙소 와이파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산뜻하게 일할 수 있어서 기쁘다.
일을 마치고 동네 산책을 하다 들른 기념품 가게에서 모든 이름이 적힌 네임텍을 발견했다. 내 영어 이름이 있을 리는 없으니, 친구 영어 이름을 찾다가 앤드류가 떠올랐다. 과연, 앤드류 네임텍이 있었다. 디자인이 예뻤으면 기꺼이 샀을 텐데 그 정도는 아니었음. 하지만 이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앤드류 생각을 잠깐 했다. 그래, 한국에 그리운 친구가 많이 있구나.
숙소로 돌아가는 공항 도둑. 메리노 울로 된 마스크 겸 목도리다. 두 개를 겹치면 바라클라바로도 쓸 수 있다. 생각보다 숨쉬기 편하고 얼굴이 얼지 않도록 도와줘서 좋다. 길거리를 보면 나만 호들갑 떠는 것 같다. 실제로 재스퍼 날씨가 그렇게 춥지는 않다. 산책하기 좋은 온도라 행복하군. 다음 주엔 40도가 된다고 하니 긴장해야겠다. 하지만 솔직히 기대되고요.
일을 마쳤다는 과수의 소식을 듣고 팀 홀튼으로 향했다. 이곳이 진정 인싸 소굴이었다. 재스퍼 사람들 다 모였네. 팀 홀튼 쿠키 맛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야기를 하며 슈퍼를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 곰을 발견해서 잠시 대화를 멈추고 사진 촬영 타임을 가졌다. 국립공원에는 저 검은 곰이 있다고 한다. 마을 표지판에도, 너의 안전은 알아서 잘 챙겨라-라는 뉘앙스의 경고판이 있음. 내일 국립공원 가는데 우리 괜찮겠지?
우리가 감동받은 바로 그 슈퍼, Nesters Market. 안주도 다양하고 정육 코너에도 고기가 많다. 지금 숙소에 가스레인지가 없어서 아쉽다. 있었다면 스테이크를 구울 때 하버드 마이야르 학과의 면모를 선보였을텐데.
샐러드 한 봉지 당 6천5백 원. 소스도 동봉되어있다. 내일 아침 먹거리다. 크루통도 들어있다고 하니 더욱 기대된다.
이건 왜 찍은 사진일까? 가끔 사진첩을 보면 왜 찍었는지 모를 사진들이 있는데, 그것만 모아서 따로 봐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를 열어도 괜찮겠군. 전시 제목은 '왜 찍었을까?' 내지는 '기억나지 않는 기억들'.
산행을 하면서 먹는 에너지 초콜릿 바처럼 보였다. 맛이 궁금해서 하나씩 샀다. 과수는 브라우니 맛, 나는 아몬드 맛. 내일 국립공원에서 먹을 예정이다. 곰이 따라오진 않겠지.
안주로 먹을 멜론도 샀다. 두 가지 색이 들어있었고 멜론 외에도 파인애플, 석류 등 다양한 과일을 팔고 있었다. 확실히 첫날 발견한 슈퍼마켓보다 종류가 다양하다.
돌아가는 길에 보인 테슬라 충전소. 아무도 충전하고 있지 않고요. 테슬라 주주인 과수는 가슴이 웅장해진다고 했다.
겨우 5시에도, 8시나 9시 같은 풍경의 재스퍼. 신기하다. 나는 늘 늦게까지 깨어있는 사람이었는데 이곳은 일찍 잠든다. 지금은 10시 41분인데 마치 심야 같은 기분이다. 그러니 일찍 자둬야겠지.
슈퍼를 들렀다 가는 길에 발견한 와인 집. 아니 무슨 재스퍼 시골에 있는 와인 가게가 서울 압구정에 있는 와인 가게보다 리스트가 많죠? 성심성의껏 두 개를 골랐는데, 회원이 아니면 구매할 수 없다는 말에... 가입하고 싶다고 하니까 안 된다고 한다. 내가 영어를 50%만 알아들어서 생긴 일 같다. 하지만 여기 말고도 와인은 많으니 쿨하게 돌아서기.
저녁을 먹으러 자메이카 샌드위치 가게에 갔는데 닫았다. 하지만 거기 말고도 저녁은 많으니 쿨하게 돌아서기 2번째. 근처에 있는 피자 집에 갔다. 하와이안 피자를 시키고, 우리는 저 멀리에 있는 화덕을 보았다. 과수야, 우리 숙소에 오븐이 없어서 마트 피자를 먹지는 못해. 그래서 대신 화덕에 구운 피자를 먹을 수 있는 거 아닐까? 삶이란 그런 것이다. 무언가를 하지 못해도, 더 멋진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아까보다는 좀 더 작은 와인 가게에 들러 '피자와 어울리는 와인이 있나요?'라고 물었다. 캐나다에서는 캐나다 와인만 먹자는 우리의 다짐 이 무색하게, 와인 가게 언니는 스페인 와인과 아르헨티나 와인을 추천한다. 언니 말이니까 다 맞겠지 뭐.
1884, 2020년 산 말벡 와인을 마셨다. 말벡과 피자의 합은 기가 막힌 조합이었다. 한국에서도 한번 같이 먹어봐야겠다. 둘이서 한 병을 먹으면 딱 기분 좋게 취하고, 일을 할 정도의 정신을 남겨둔다. 지금도 술 먹고 쓰는 일기다.
피자는 저녁이었고, 안주는 따로 있지요. 한국에서 가져온 김부각과 기차에서 가져온 꿀을 뜯어본다. 하나하나 알차게 먹는 우리가 귀엽고 씩씩하다. 남겨둔 까망베르 치즈도 꺼냈다. 내일 요거트랑 멜론을 같이 먹을 생각에 벌써 기쁘다. 아이스크림 먹는 것도 잊지 말자.
지금 내기 일기를 쓰고 있는 풍경이다. 배터리를 분명 충전해두었는데 이유를 알 수 없이 빨간불이 뜨고 있다. 세상의 모든 걸 이해할 수는 없으니까, 이대로 내버려두자. 자고 일어나면 100% 충전이 되어있을 것이다. 나도, 맥북도. 고요하고 기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