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처음 오는 나라인데 왜 익숙하지. 배고프다. 시간을 계산하니 공복 7시간째, 벌써 그렇게 됐다. 숙소에 가면 대체 몇 시일까.
한시 반쯤 도착했고, 흥 넘치는 여행객들이 문을 열어줬다. 스윗 드림을 꾸라며 뭐라고 했던 기억이 얼핏 난다. 그들의 인사처럼 잠을 잘 잤다. 한국에서처럼 애매한 6시 50분에 눈을 떠 부스스 일기를 적는다. 돌이켜보면 담담하고 씩씩했던 어제구나. 소망처럼 뜨거운 샤워, 조식을 이뤘는데 상상만큼 멋지진 않았다. 샤워는 버튼형이라 쉴 틈 없이 눌러줘야 했고, 조식은 햄을 데울 방법이 없어 생 햄을 사자처럼 먹는 중이다. 포켓 버터는 벌써 세 개째, 약간 미친 것 같아. 혼숙 도미토리는 혼숙이라기엔 남성 전용 같았다. 거기서 살금살금 캐리어를 열고 마지막으로 침대에 누워, 가장 먼저 일어나 일기를 적는다. 예전에 호스텔에서 한국인은 너무 부지런하다는 외국인의 볼멘소리를 들은 적 있어 오늘은 부지런을 들키지 않으려고 금방 로비로 나왔다. 그건 편견이에요,라고 말하기엔 나부터가 굉장히 부지런한 편이라.(마치 제주도 사람에게 너네 집에 귤나무 있어? 하면 발끈하지만 정말 다니던 고등학교에 귤나무가 있었다던가) 조용히 해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자고 있는 여행자들을 위해 예의를 지키려 노력한다. 조식에 대한 총평은. 이게 뭐지?
점심으로는 훌륭한 브런치를 먹었다. 햄버거 가게인 줄 알고 온 게 함정. 뭔지도 모르고 머쉬룸 하나 읽어 주문한 오믈렛 맛은 아주 훌륭했다. 입에 맞냐는 말에 무이 비엔(muy bien : 아주 좋다)이라고 찬사를 건넸다. 식사를 마치고 마끼아또를 기다리는 중이다. 마끼아또가 뭐지? 카라멜 마끼아또가 맛있으니 마끼아또도 맛있겠지- 하며 주문했다. 사실 여행 중 나를 안 아프게 하는 게 꽤 중요한데 그중 한 가지가 카페인 안 먹는 것. 다짐은 어긋나라고 있는 것처럼 부질없다. 에스프레소에 멀쩡했던 파리 여행을 떠올리며 유럽 카페인에 도전해본다. 아아. 바르셀로나는 뭔가 감지덕지해. 환하고 밝고... 대체 어디에 소매치기가 있다는 건지... 사람들 모두 예쁘고 잘생겼다. 내 얼굴이 이렇게 크게 느껴지다니 역시 유럽이야.
에어비앤비, 정말 잘 선택했다. 많이 낡았지만 충분히 깔끔하고 위치도 좋으며 테라스가 있어 환하네. 저 멀리 슈퍼에서 장을 봤는데 실수로 올라간 집 위쪽에 (1분 거리) 비슷한 크기의 마켓을 발견했다. 좋은 운동이었다. 침대에 누워 차 소리를 듣는다. 우리 집에선 잘 듣지 못했던 바깥 소음들. 아이의 목소리와 어른의 대화와 그 외의 것들이 섞여서 공간을 맴돈다. 비행기 안에서 만지작 거리다 발톱의 반이 뽑혀버린 새끼발가락을 까딱여본다. 덜 아픈 만큼 적당히 거슬리는 통증. 밴드를 대충 감고. 이따가 해변에 가볼 생각이다. 거기서 자전거를 한 바퀴 타고, 노래를 들은 다음 저녁은 샹그리아와 빠에야를 먹어야지. 지하철도 타 볼 생각이다. 할 일이 많네. 아까는 집주인의 요리 냄새를 맡았다. 엄청 맛있는 거 드시나 봐요.
해변에 왔다. 나름의 계획이라 한다면 해변을 가는 것이 최종 미션이고 그 안에 교통권 끊기, 빠에야 먹기가 포함되어 있다. 지하철에서 10회 이용권인 T-10을 발권했다. 10.2유로라니 굉장히 합리적인 가격. 런던에서는 꽤 비싸게 주고 지하철을 탔던 것 같은데, 여긴 환승도 된단다. 종이 티켓이지만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 소지하고 10번 사용한다. 가뿐히 발급을 받고 버스를 타러 갔다. 버스에 타서는 꼭 이 역에 내려야 해, 하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는데 나 말고도 모두가 내리더라. 종점이었다. 설렁설렁 걸어 해변가로 향한다. 건물 대신 하늘이 가득 보이는 저쪽이 바다겠지. 여행을 다닐 땐 매번 한 노래를 테마로 지정해 반복해 듣는다. 이번엔 call me by your name의 ost. 가벼운 피아노 건반이 발걸음을 들뜨게 한다. 걷고, 걸어, 해변이다. 처음 보는 짙은 푸른빛이었다.
지독하다. 위염이 여기도 따라붙다니. 아까는 고독한 미식가 고로상처럼 신나게 길을 걷다 정색을 하며 '하라가...' 되뇌었다. 고로상처럼 서둘러 가게를 찾았고 맛도 인테리어도 마음에 드는데 위가 따라주지 않아 속상하다. 처음 빠에야의 크기를 보고 아... 이건 너무...(굉장해)라고 생각했는데 그 얇기를 확인한 후에 자신이 생겼다. 하지만 약해진 내겐 역부족이다. 시시한 자신이 원망스럽다. 먹고 좀 거닐어야겠어. 샹그리아는 눈이 커지는 맛. 이것도 무슨 사이즈가 북유럽 벤티야. 스페인의 인심에 감동받고 갑니다.
의문의 티라미수.. 자꾸 먹을 거냐고 물어봐서 포함된 거냐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한 웨이터. 아니잖아요!! 5유로라니 이 도둑놈아 ㅋㅋㅋ 그래도 실컷 먹은 것치곤 21유로라 괜찮다. 숙소에는 9시 20분쯤 들어왔다. 해가 진 바르셀로나는 지상의 밤을 떠올리게 해. 길거리가 이렇게 깨끗할 줄 몰랐다. 마찬가지로 깨끗한 나의 숙소. 온통 흰 벽인 방에 걸린 파란 옷을 바라본다. 여긴 빨간색 옷을 챙겨 왔어야 하는 거였어. 그러니 언제든 사자. 자라를 들를 생각에 마음이 드릉드릉하다. 지하철을 타니 참 편리하고 좋더라. 예전엔 왜 그렇게 많이 걸었을까? 몇 푼 아끼자고 다리가 그 사달이 날 때까지. 나야 그래도 괜찮지만 부모님을 모신 여행에서 더 편치 못하게 해드린 점이 너무 아쉽고 죄송하다. 난 그 여행의 학습으로 이젠 이렇게 편하게 여행을 하고... 아니, 바르셀로나가 교통이 잘 되어있는 걸까. 교통비가 꽤나 합리적이고 이용이 편했어. 여기를 여행하며 정말,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을 했다. 멋진 날씨, 처음 보는 바다색, 적절한 거리의 인구 밀도, 친절한 사람들, 맛있는 음식까지. 그간 다녀본 유럽 중 가장 좋다. 일기에 '사랑에 빠질 것 같다'라고 적은 후, '사랑에 빠졌다'로 고쳐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