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0일 : 네르하의 호캉스

by 이연

태풍이 불어 사진이 거의 없습니다.




네르하엔 비가 온단다. 어제의 그라나다처럼 농담이 아니고 강수 확률이 100%로 표시되어있다. 비 오는 수영장? 슬프다.. 괜찮아.. 네르하는 또 올 거야. 아니, 스페인을 다시 올 듯싶다. 볼게 많고 멋진 나라야. 난 여행에 앞서 우산과 우비를 철저히 준비할수록 날씨가 맑고 비가 안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뜻한 옷을 두고 올 수록 춥고.) 경량 우산에 유난스럽게 우비까지 들고 오니 행운을 꽤 오래 누렸다. 오늘이 화요일,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았구나. 나름 그래도 6일을 마른 날씨로 지낸 것은 큰 축복이다. 그러니 네르하의 비를 겸허히 받아들여야지.라고 착하게 다짐하면 비가 안 올 것 같아서 써보는 다짐...





네르하엔 비가 온다. 젠장. 날씨 어플이 소망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버스는 두 번 정도 다른 정류장에 멈췄다. 어쩐지 허둥대는 탑승객들에게 아직 네르하가 아니라고 기사님은 말했고, 곧이어 쓰러지듯 자던 나는 '네르하~'라는 환호 같은 알림에 깼다. 도착했다. 비가 나부꼈다. 터미널 없이 정류장 길가에 뚝 떨어진 난 흩어진 사람들을 잃고 혼자 가방에서 우비를 찾았다. 드디어 장착, 안심이야. 호텔은 생각보다 더 좋았다. 다른 일정 다 호텔로 바꾸고 싶다, 라는 간절한 생각을 하다 테라스를 보니 파란 수영장이 보였다. 저거야! 야심 차게 준비한 수영복을 입고 일층에 내려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밖은 생각보다 더 추웠고, 잠시 발을 담근 나는 '여기 들어가면 죽어.'라고 생각했다는 것.


얼음물이었다.




지금 음식점에 와서 일기를 쓴다. 나름 외딴곳에 왔는데 한국인이 있다. 나는 외국에서 한국인을 마주치는 순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쩐지 늘 일행인 그들을 보면 새삼 외로워진달까. 혼자인 게 괜찮은데 또 매일 그렇진 않나 보다. 그래도 씩씩하게 많이 먹었다. 꽤 커서 놀란 하몽과, 와인 그리고 맥주, 감바스 필필. 평소의 나였으면 이것의 정확히 반을 먹었을 텐데. 시켜놓고 거의 다 먹은 내 모습, 훌륭하다.


와인은 무조건 무조건이야


메론과 하몽. 단짠의 조화가 아름답다.


이건 한국이 잘한다.




밖에선 비가 나부끼는 소리가 들린다. 오랜 낮잠을 잤다. 호캉스라고 하나, 비가 오니 호텔에서 쉬지 뭐! 했던 것치곤 진짜 그냥 피곤해서 잠을 실컷 잤다. 꿈에선 따뜻한 수영장이 나왔다. 사람들과 대화도 나눴다. 깨보니 나는 혼자고 실컷 부는 바람뿐이다. 그래도 호텔은 만족스럽다. 점심을 잔뜩 먹고 낮잠을 잔 후 저녁 먹을 시간이라니, 완벽하다.





휴양을 기대하고 온 신혼여행의 성지 네르하에서 폭우에 갇혀 강제 호캉스라니 뭔가 웃기다.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가 문득 떠올랐다. 그래, 이건 비라기엔 태풍이야. 우비를 사며 한국에서도 2n 년 없이 살았던 이게 필요할까? 했는데 현명한 유난이었다. 점심을 거하게 먹은 탓에 저녁은 간소하게 호텔에서 먹기로 했다. 낮에 먹은 마늘냄새가 온몸에 나는 것 같다. 벌써 7시 49분이다. 슈퍼마켓에서 포켓형 올리브 오일을 샀다. 30센트, 만족스럽다. 환타도 샀다. 원래 나는 환타를 마시지 않는다. 그 인공적인 향이 너무 싫기 때문인데, 스페인 환타는 과즙 함량이 더 높아 맛있다고 해서 사봤다.





환타는 그냥 내가 알던 환타였다. 이런 경험 때문에 나는 잘 도전하지 않는 성격인데. 내게 도전이란 철저히 의식적인 행동이다. 여러 가지를 자주 해봐야 데이터가 많이 쌓이니까, 라는 의무에 싫지만 하는.. 늘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용인 가능한 범주까지 도전한다. 환타는 80센트에 구매했으니 괜찮다.





와인을 마셨다. 작은 병은 3잔이 나오는구나. 피곤하니 목욕은 내일 아침에 해야겠다. 바게트와 치즈, 하몽은 훌륭했다. 포켓으로 30센트에 파는 올리브유에 반했다. 내일 잔뜩 사가야지.






홀로 종이에 일기도 잔뜩 쓰고, 창밖도 보고, 적당히 멍 때리기도 했다. 네르하. 고요한 휴식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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