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 잠도 매일 이곳에서 자고 싶다고 생각했어. 고요한 방의 백색 소음과, 옅은 커튼과, 하얀 이불 같은 것.
핸드폰을 잠시 떨어뜨렸을 뿐인데 카메라가 먹통이다. 말도 안 돼... 어쩐지 피로를 느껴 카페에 왔다. 마침 쉬고 싶었는데. 누텔라 크레페.
후지필름을 가져온 것과 전면 카메라는 무사하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리퍼와 부분 수리와 사설업체
사이에서 고민이다. 뭘 해도 10만 원은 든다니.. 내 잘못이니 뭐라 할 말이 없다.
실수로 산 5유로짜리 와인이 포트와인이었다니, 잘한 실수다. 하늘은 짙은 남색과 우주 색의 사이에 있다. 나는 맨발로 벤치에 앉아 와인을 마시고,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썼다. 듣게 되는 옆자리 한국어가 싫어 이어폰을 꼈다. 나는 무슨 글을 쓰고 있는 걸까? 나를 위한 글? 보여주기 위한 글? 나를 위해 쓰는 보여주는 글? 모르겠다. 이따금 공기에 섞인 담배냄새를 맡는다. 냄새라는 건 고를 수 없으니까. 내게 주어진 소리와 냄새와 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감내할 수 있는 무력감을 느낀다.
포르투는 파란 펜의 드로잉이 잘 어울린다.
느긋하구나. 오늘은 그저 돌아다니고 핸드폰 참사에 잠시 슬퍼하다, 이내 기운을 차려 여러 장의 그림과 일기를 쓴다.
포토스팟 앞에 앉아있다. 다양한 사람이 추억을 남기는 모습을 본다. 누군가는 저 돌 위에 앉았고, 누구는 서성였으며, 어떤 이는 올라서서 팔을 넓게 벌렸다. 다들 일분 남짓 머무는 지점을 나는 오래 바라본다. 강은 남빛이고 사람들은 금빛이다. 빛이 닿지 않는 강은 바위 아래 막막한 바다 같다. 저 아래도 이 도시처럼 무궁무진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이 아름다운 강을 보며 슬퍼서 운 사람도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발끝이 시리다.
파란색 신발을 신으며 파란 목도리를 두른다. 오늘은 처음으로 동생의 선물을 샀다. 동생은 군인이다.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는 거의 다 좋아한다. 그래서 내 취향의 모자를 샀다. 4유로인 건 비밀로 할 거야. 이번 여행엔 그 밖의 선물은 사지 않을 생각이다. 그간 회사 사람이며, 만나는 친구며, 뭘 그리 잔뜩 샀는지. 몰랐지만 나 정이 많았네. 지금은 미친 듯 내 물건만 사고 있다. 잘하고 있는데..? 어제 만난 동행이 포르토에 오면 1일 1강을 해야 한다고 했다. 역시 잘하고 있네. 좋은 노래도 듣고. 아깐 맛있는 파스타도 먹었으니까. 그래그래. 기특하다.
초록색 가방을 샀다. 나는 파란색을 좋아하는 병이 거의 다 나았고, 이제 초록과 카키에 집착하는 병에 서서히 걸리고 있다. 이 병들의 공통점은, 깨달은 순간 이미 말기인 것. 이상하다. 그렇게 좋았던 파랑에 눈길을 거둬버린다. 지겹다는 듯. 생각해보면 파란색 옷, 모자, 신발, 목도리, 가방, 노트, 펜, 뭐 가질 수 있는 물건의 부류로는 다 갖고 있다. 그게 왜 좋았는진 정확히 모르겠어. 그냥 눈에 들어오니까. 그걸 들고 있는 내 모습이 좋으니까 좋아했다. 지금도 싫은 건 아니지만. 와, 이상하다. 이런 마음도 변하는구나. 친구들 다 아무도 안 믿을 거다. 뭐. 시간이 지나면 나를 초록으로 기억하게 될 거야. 나는 원래 연두색을 좋아했던 거 전혀 몰랐던 것처럼.
마음이 변하는 일에 너무 슬퍼하지 않기로, 오늘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