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2일 : 마드리드 디너

by 이연

12시 소등이요? 정각이 되니 주변이 캄캄하다. 순간적으로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아니.. 어두운 건 좀 그래요. 애초에 왜 비행기가 새벽에 출발하냐고요.




잠에서 깼다. 잠에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새벽 세시. 추워서 머리가 아프다. 화장실에 들러 거울을 보니 청자켓이 구겨져있었다. 가난한 주인 만나서 첫날부터 네가 고생이지. 그래도 나만큼 물건 간수 잘하는 애도 잘 없어. 한국에서 잘해줄게. 그런 소용없는 생각을 하다 전광판을 기다린다. 한시 삼십 분은 지나야 체크인이 열릴 것이다. 화장실 가는 길에 둘러보니 나 같은 사람이 도처에 널브러져 있다.(표현이 정확하다) 아까는 분명 카페테리아였는데 새벽이 되니 피난처가 되어있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누웠다. 여행 초반에 산 머플러가 담요로 잘 쓰이는 중이다. 나는 얇은 섬유 한 장이 이렇게 따뜻할 줄 몰랐다. 신문지도 뜻밖에 따뜻하다는 그 말들처럼, 집이 아닌 곳에선 소중한 것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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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한두 시간 잔 건가. 비행을 하는 중이라 생각하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겠군. 배는 고픈데 속이 예민한 기분이라 물만 조금씩 마시고 있다. 라이언에어는 게이트 오픈이라고 해놓고 아무것도 안 한다. 뭐, 해외여행에 이런 일이 한두 번인가.




일등으로 수속을 마쳤다. 면세점에서 가장 오래 기다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와이너리 투어를 따로 하지 않았는데 면세점이야말로 좋은 투어 장소구나. 포트와인 10년 산이 11유로라니 꽤 괜찮다.




공항 직원 근무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라이언에어 게이트 직원은 단 한 명이고, 추가 화물 스티커 붙이는 것과 입장까지 홀로 다 한다. 아이고.. 새벽에 비행기를 타는 나도 고생이지만 일하는 사람은 더 고생이다.




갤러리에 모아둔 교통권을 본다. 나는 늘 타기 전에 놓치는 상상부터 한다. 그래야 2안, 3안을 미리 상상하여 대비할 수 있으니까. 그런 일은 살면서 거의 없었다. 이번 출발 비행기뿐. 그건 오히려 걱정을 안 했다. 당연히 대안을 항공사에서 준비해놓을 테니. 한국인이라 그런가, 나라서 그런가. 몹쓸, 아니면 유용한 완벽주의. 라이언에어도 무사히 탑승했다. 차질 없이 차근차근 여행을 마쳐간다. 눈이 감긴다. 부디 누워서 잠을 자고 싶다.




설마 짐이 안 오는 건 아니겠지. 라이언에어는 너무 안 좋은 말들이 많아 긴장했다. 주황색 캐리어가 무사히 나온다. 짐을 다시 챙기고, 렌페를 타기 위해 터미널을 옮겼다. 옮긴 터미널엔 맥도널드가 있었는데 맥모닝과 콜라, 감자튀김이 6유로가 넘는다. 포기했다. 저 포도는 신포도일 거야, 같은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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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 솔광장 도착. 아아. 밥 먹고 좀 씻고 자야겠어. 해가 따사롭다. 큰일이네, 선크림도 안 발랐는데. 너무 힘들어.. 좀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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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는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밥을 먹으러 나갔다. 12시에 오픈인 가게를 갔는데 30분 뒤에 오란다. 좀비처럼 쇼핑몰을 서성이다 간신히 들어갔다. 메뉴 델 디아. 나는 이 멋진 제도를 왜 아직 3번밖에 못 겪은 건지. 어쨌거나 나쁘지 않은 점심을 먹고 숙소에 돌아왔다. 1시가 지났지만 체크인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기다리다 쓰러져 잠들었다. 폴리나가 나를 깨우며 아이를 어르듯 어서 침대에 가서 누우라고 부축해줬다. 눕고, 정말 아이처럼 굿나잇 키스를 받았다. 그걸 깨어나서야 아 그랬군, 할 정도로 쓰러져 잔 것이다.




씻고, 정신을 차리니 5시쯤 되었다. 나라별 이동을 한 날은 늘 그랬다. 6시부터 여기서 저녁을 준다고 한다. 리뷰를 보니 저녁을 만드는 재미가 있다고. 그래서 또 거리를 거닐다 6시쯤 들어왔다. 뭐해? 같이 장 보러 가자! 응? 응.. (너네 둘이 다녀오는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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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감자를 깎자.(10킬로인데..?)


DSCF3026.JPG 군대 식사 아니냐고 물어봤다


소스를 저어줘. 등등. 자각해보니 요리에 참여한 자원자는 나 하나였고 나머지는 9시가 되니 착착 자리에 착석했다. 시간을 잘못 알았어.. 32인분을 만든다는 게 농담이 아니었다. 놀라운 사실은 재료를 사는데 총 22유로가 들었다는 것이다. 나 혼자 22유로짜리 점심을 먹은 날이 많았는데.


DSCF3028.JPG 맛있는 소스. 재료 외웠는데 까먹어서 야속하다. 닭육수에 파프리카 가루, 식초, 후추, 그렇게 들어갔던가..




사실 감자를 열심히 깎긴 했지만 나머지 요리는 거의 호스텔 스텝들이 만들었다. 근데 마지막엔 내가 도와줬다고 박수도 받고, 갈릭 브레드 좋아하는 것 같다면서 3개 받고 (남들은 2개) 요리 만들면서 술도 얻어마시고... 마드리드의 밖은 거의 기억이 안 나지만 호스텔에서 너무나 재밌었다. 내일은 다 같이 톨레도를 간다고 한다. 안녕, 나는 그날만 피해서 갈게. 오늘은 즐거웠다.


DSCF3039.JPG 남들은 2개
DSCF3041.JPG 나는 3개
DSCF3042.JPG 술을 계속 얻어마셨다. 와인과 보드카와 맥주.. 주는 족족 마신다
DSCF3044.JPG 박수를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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