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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버트 Jun 02. 2015

그 단어들


내 일상에서 단어를 나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업계획서와 각종 기획안에 빼곡히 들어차는 13pt의 휴먼명조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나열하기에 좋은 폰트는 고딕 또는 돋움에 9pt이고 줄간격은 브런치 기준으로는 이 그대로, 한글에서는 160%, 네이버 블로그 창에서는 180%이다. 대책없이 까만 글씨보다는 진회색의 글씨들이 보기도 좋고 느끼기도 좋다. 엔터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빼곡히 들어서는 것들을 보면 왜인지 내 자신의 작은 부분을 내려놓는 것 같아서 마음에 큰 위안이 된다.


만약 2년전 또는 3년전의 내가 이 브런치라는 곳을 만났더라면 나는 아마 '얘는 할 일 없는 애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써내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내가 지금까지 믿어왔고 쌓아온 것들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에 늘 휩싸여 있었다. 취업도, 학업도, 연애도 마음대로 되는게 하나 없었다. 나를 소개하는 글들은 샅샅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고 나를 소개하는 말들은 갈기갈기 허공으로 흐트러졌다. 일대일 면접, 이대이 면접, 일대삼 면접, 십대칠 면접까지 참 많은 곳을 원했(다고 생각했)고 참 많은 곳과 인연이 아님을 깨달았다.


학교 도서관에 하루종일 쳐박혀 있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 남산을 지나면서 바라보는 그 빼곡한 불빛들이 얼마나 원망스럽고 헛헛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불빛들을 찢어발기고 싶었다. 모두 너만 안돼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연애로 인한 질투만 있는 줄 알았던 세상에서, 돈 직장 인생 학업 등등 차라리 질투하지 않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는게 더 빠를 정도로 쉼없는 질투를 느꼈다.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질투들이 머리위에서 나를 잡아먹는다고 느꼈다.


그 때 미친듯이 단어를 나열했다. 버스안에서, 집에서, 학교에서, 지하철안에서. 다른 블로그와 게시판들에, 노트에, 수첩에, 또는 이면지에, 수많은 오기 치기 객기들이 일렁일렁 춤을 추었다. 그때는 그러지 않으면 살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렇게 써내려갔기에 더 흔들리지 않았다. 


그 당시의 단어들을 다시 뒤적여본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아니야 그래도 그때가 더 힘들었어, 그때도 지나갔는데 지금도 지나가겠지, 나중에 지나가면 뭐해 어차피 지금은 힘든걸. 

요즘은 단어,그때의단어들을아름답다고느낀다.가증스럽다.나는 절대로, 이때의 단어를 소중히 품는, 그래서 그땐 그랬지라는 생각을 갖는 꼰대가 되지말자고 내 자신과 약속했었다. 

그런데 자꾸 그런다. 그게 나를 슬프게 하고 그게 나를 또 나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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